“누구도 남의 노동에 대해서 프리라이드(무임승차)할 수는 없습니다.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저작권법 전문가인 박정인 덕성여대 에이아이 다이나인포(AI DynaInfo) 연구소 교수가 기조 발제에 나서 단호한 얼굴로 이렇게 말하자, 29일 서울 마포중앙도서관 6층 강당을 메운 출판업계 관계자들의 얼굴에 안심하는 기색이 깃들었다. 거대 에이아이 기업들이 ‘인공지능의 학습’이라는 명분을 들어 출판물을 마구잡이로 섭취하듯 이용하며 저작권을 침해하는 상황이지만, 현행법으로도 이를 방어할 수단은 충분하다는 설명이었다. “저작권법보다 더 무서운 법률이 있다는 걸 알고 계십니까? 형량이 더 큰 ‘부정경쟁 방지 및 영업비밀 보호에 관한 법률’(부정경쟁방지법)입니다. 남의 노동에 합의 없이 편승하면, 그 즉시 다 처벌입니다.”
이날 한국출판인회의(이하 출판인회의)가 ‘에이아이(AI) 시대의 출판 생태계, 기회와 위기 사이에서 길을 찾다’를 표제어 삼아 연 긴급포럼에는 400여명이 참석해 에이아이 위기 앞 출판업계의 긴장감을 여실히 드러냈다. 위기는 복합적이다. 저작권법 범주에서 보호받는 출판산업은 음반·영화산업 등 이웃 업계보다 권리 보호에 취약하다. 반면, 지난 1월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인공지능 발전과 신뢰 기반 조성 등에 관한 기본법’(인공지능기본법) 계도기간이 내년 1월 마무리되면, 출판사들에도 본격적으로 부과되기 시작할 책임의 문제는 뚜렷하다. 이 법 제31조가 명시하는 인공지능 투명성 확보 의무에 따라 출판사들도 에이아이가 작품에 얼마나 개입했는지 밝혀야 하기 때문이다.
권리 행사에도 사실상 속수무책인 출판사들은 새롭게 부과된 책임 앞에 허덕이는 처지다. 출판인회의는 투명성 확보 의무 조항을 위한 가이드라인 설계 작업에 착수한 상태다. 출판인회의 에이아이미래전략위원장을 맡고 있는 윤성훈 클레이하우스 대표는 이날 포럼에서 3단계 가이드라인을 제안했다. “인공지능의 도움을 일절 받지 않은 도서는 물론, 미국작가조합에서 기준을 제시한 것처럼 맞춤법 및 문법 검사, 아이디어 구상, 개요 작성, 브레인스토밍 등에 에이아이를 활용한 도서”는 1단계, 에이아이 생성물이라도 인간 저자의 통제와 검증을 충분히 진행한 도서는 2단계, 인간 저자의 충분한 통제와 검증 없이 생성된 저작물은 3단계로 구분해 표기하자는 것이다. 윤 대표는 “3단계 도서가 이른바 ‘딸깍 도서’이며, 이 도서는 납본과 유통에 있어 불이익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서점에서도 이 3단계 도서를 구분해 관리할 책임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최근 에이아이 ‘딸깍’ 출판물의 납본을 거부한 국립중앙도서관 쪽도 포럼에 참석해 어려움을 호소했다. 박주옥 국립중앙도서관 지식정보관리부장은 “2024~2025년 납본 반려된 전자책 건수가 총 1만1651건에 달한다. 저품질 콘텐츠의 무분별한 유입이 국가지식정보 관리 체계에 심각한 과부하를 유발하고 있다”고 밝혔다. 국회 역시 에이아이 생성 자료의 무분별한 납본을 방지하려 도서관법 개정안을 논의 중이다. 보존 가치가 현저히 낮은 자료에 대한 납본 거부권 명시, 에이아이 생성물임을 은폐한 경우 납본 보상금 지급 대상 제외 및 환수 조처 등이 입법 사항으로 고려되고 있다.
출판업은 에이아이의 직격을 맞는 산업이기도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출판물의 윤리와 신뢰도를 지켜내는 ‘수문장’ 구실을 해야 한다는 데 참석자 대부분이 공감했다. 박정인 교수는 “출판은 이제 책을 만드는 산업이 아니라 지식의 흐름과 사용을 통제하는 산업으로 전환해야 한다. 지식이 어떻게 생성되고, 구조화되며, 활용되는지를 결정하는 산업이 돼야 한다”고 말했다. 문지혁 소설가는 “중요한 질문은 에이아이의 사용 유무가 아니라 ‘무엇을 맡겼는가? 어디까지 넘겼는가? 무엇보다, 마지막 책임은 누가 지는가’가 될 것”이라며 “앞으로 이 질문들이 창작 윤리에서 가장 핵심적인 기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글·사진 엄지원 기자 umkij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