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코니 확장을 통해 얻은 것은 눈에 보이는 수치상의 평수였지만, 그 대가는 보이지 않았기에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 공간이 사라지면서 우리는 하루 종일 커튼을 내리고 살아야 하는 폐쇄적 거주를 자신도 모르게 강요받게 되었다. 밖에서 안이 들여다보일까 전전긍긍하며 창문을 닫아걸어야 하는 도시인의 서글픈 풍경은 발코니 상실이 만들어낸 직접적인 결과물이다. 코로나19 팬데믹 시절 집 안의 답답함이 극에 달했던 진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코로나19가 할퀴고 간 자리에서 우리는 뜻밖의 진실 하나를 마주했다. 전례 없는 고난의 시간을 버티며 일상의 소중함을 새삼 깨달았고, 온종일 집 안에 갇혀 지내야 했던 그 나날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자신이 사는 공간의 한계와 정면으로 대면했다. 바깥으로 나갈 수도, 사람을 만날 수도 없는 상황에서 집은 더 이상 하루의 끝에 돌아오는 안식처가 아니라 하루 종일 버텨야 하는 생존의 공간이었다. 그리고 그 답답함의 근원을 차분히 거슬러 올라가면, 오늘 이야기할 주제에 닿는다. 현대 한국인에게 가장 익숙한 이름으로 불리지만 정작 실체는 이미 오래전에 사라져버린 공간, 바로 ‘발코니’다.
발코니, 베란다, 테라스. 이 세 단어는 대중에게 여전히 혼용된다. 이들은 본래 서구에서 유입된 공간 개념인 데다, 한국 특유의 ‘실내화’ 집착—어떤 반외부 공간이든 창호를 달아 방으로 만들어버리는 습성—이 개념을 더욱 뒤섞었다. 사전의 정의로는 발코니는 건축물 외벽에 접하여 부가적으로 설치되는 완충 공간이고, 베란다는 집채에서 툇마루처럼 튀어나오게 하여 지붕을 씌운 부분이며, 테라스는 실내에서 직접 밖으로 나갈 수 있도록 정원에 뻗쳐 나온 곳을 말한다. 그러나 이런 정의만으로는 전문가들조차 셋을 명확히 구분하기 어렵다. 물리적 구조로 들여다보면 조금 더 선명해진다. 테라스는 지상층에서 건물 바닥이 연장되듯 생기는 공간이고, 그 위에 철거 가능한 나무 널을 깔면 데크가 된다. 베란다는 위층이 아래층보다 작을 때 생기는 아래층 지붕 위의 공간이다. 발코니는 외벽 바깥으로 돌출된 독립적인 외부공간으로, 건축 용어로는 한쪽 끝만 지지된 ‘캔틸레버 슬래브’라 부른다. 따라서 흔히 ‘베란다’라 부르는 아파트의 그 공간은 정확하게는 ‘발코니’가 맞다. 그런데 아랫집이 발코니를 확장해 실내로 만든 경우, 윗집의 그 공간은 발코니인가 베란다인가. 이론과 현실이 뒤엉킨 이 질문에 단서 없이 명쾌하게 답할 건축학자는 거의 없다. 이처럼 개념조차 제대로 정립되지 않은 혼란 위에서 한국 건설 시장의 고질적 병폐인 ‘발코니 확장’이 자라났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1999년 이전까지 발코니에 창호를 설치하거나 온돌을 까는 행위는 엄연한 불법이었고 철거 대상이었다. 그러나 더 넓은 실내 공간을 향한 소비자의 욕구는 거셌고, 불법 확장에 대한 단속의 현실적 어려움까지 겹치면서 정부는 결국 2005년 법 개정을 통해 ‘발코니 확장 합법화’라는 패배 선언을 했다. 이는 발코니 ‘확장’이 아니라 발코니 ‘소거’라 불려야 하지만 부정적 표현을 피하기 위해 업자들이 도입한 용어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오류도 있었다. 이후 새로 분양되는 아파트는 기본형과 확장형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게 되었지만, 단 한평이라도 더 원하는 소비자 심리를 건설사가 영리하게 파고들면서 확장형은 어느새 사실상의 기본 사양으로 굳어버렸다. 그 결과 2005년 이후에 태어난 세대라면 ‘진짜 발코니’가 어떻게 생겼는지 눈으로 본 기억 자체가 없을 것이다. 발코니는 법의 이름 아래 조용히, 그리고 완전히 사라졌다.
발코니 확장을 통해 얻은 것은 눈에 보이는 수치상의 평수였지만, 그 대가는 보이지 않았기에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실제로 발코니는 단순히 빨래를 너는 곳이 아니었다. 햇살의 냄새를 맡고, 화분을 가꾸며 계절의 변화를 온몸으로 느끼고, 비 오는 날 창문을 살짝 열어 빗소리를 들으며 차 한 잔을 마시는 감성적 영토였다. 도시의 풍경과 개인의 사생활이 만나는 가장 입체적인 전이 공간이기도 했다. 그 공간이 사라지면서 우리는 하루 종일 커튼을 내리고 살아야 하는 폐쇄적 거주를 자신도 모르게 강요받게 되었다. 밖에서 안이 들여다보일까 전전긍긍하며 창문을 닫아걸어야 하는 도시인의 서글픈 풍경은 발코니 상실이 만들어낸 직접적인 결과물이다. 코로나19 팬데믹 시절 집 안의 답답함이 극에 달했던 진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밖으로 나갈 수 없는 상황에서 단 한 뼘이라도 외부와 연결된 공간이 있었다면, 그 고립감은 훨씬 덜했을 것이다.
공간의 상실은 정서적 차원에 그치지 않는다. 발코니는 외부의 열기와 냉기를 한번 걸러주는 열적 완충 지대이기도 했다. 그것이 사라지면서 거실은 차가운 유리창과 직접 맞닿게 되었고, 결로와 난방 효율 저하라는 현실적인 문제는 고스란히 거주자의 몫이 되었다. 냉난방비가 오르고 곰팡이가 피어오르는 창가 앞에서 우리는 비로소 그 완충 지대의 가치를 실감하지만, 이미 사라진 공간을 되돌리기란 쉽지 않다. 여기에 더해 건축적 손실도 크다. 발코니가 만들어내는 리듬감 있는 그림자와 요철은 도시 입면을 풍요롭고 생동감 있게 만들어 왔다. 그것이 사라진 자리에 남은 것은 성냥갑처럼 매끈하고 단조로운 아파트 외벽뿐이다. 우리는 면적을 얻는 대신 도시의 생명력을 잃었다.
이쯤에서 우리는 해외 사례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프랑스 파리나 스페인 바르셀로나, 일본 도쿄의 오래된 주거 지구를 걷다 보면 각 층마다 개성 있는 발코니가 돌출되어 화분과 빨랫줄과 작은 의자를 품고 있는 풍경을 흔히 볼 수 있다. 그 발코니들은 단순한 건축 요소가 아니라 거주자의 삶이 바깥으로 흘러나오는 통로이며, 도시 전체에 인간적인 숨결을 불어넣는 장치다. 누군가의 발코니에 빨간 제라늄이 피어 있고, 그 옆집 발코니에서는 노인이 커피를 마시며 거리를 내려다보는 장면. 바로 우리가 잃어버린 도시 풍경이다. 면적 효율만을 좇는 대신 삶의 여백을 도시 공간과 공존시킨 도시들은, 발코니 하나로도 삶의 질이 얼마나 달라질 수 있는지를 명징하게 증명하고 있다.
물론 이 모든 것은 건설사가 면적을 미끼로 소비자를 유혹하고, 소비자는 이를 자산 가치로 환산하는 기형적 구조가 오랜 시간에 걸쳐 쌓아 올린 결과다. 하지만 집을 투자 가치나 면적의 합으로만 계산하는 시대도 서서히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최근 일부 혁신적인 설계에서 오픈 발코니를 다시 도입하려는 시도가 조심스럽게 나타나고 있다. 반려견이 햇볕을 쬐고, 아이가 흙을 만지고, 어른이 저녁노을을 바라볼 수 있는 공간. 집 안에 그런 자리 하나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위안인지를, 우리는 팬데믹을 통해 몸으로 배웠다. 그런 공간이 있는 집이 진정으로 사람이 사는 집이다.
발코니는 단순한 서비스 면적이 아니다. 도시라는 정글 속에서 인간다움을 유지하게 해주는 최소한의 정서적 방어선이며, 우리가 자연과 계절과 하늘에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을 일깨워주는 도우미다. 발코니의 복원은 단순한 설계 변경이 아니라 우리 삶의 균형을 되찾는 선언과 맞닿아 있다. 사라진 발코니를 되찾는 일은 우리가 잃어버린 일상의 낭만과 인간적 품격을 회복하는 일이다. 집이 넓어지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그 집에서 우리가 얼마나 자유롭게 숨 쉴 수 있느냐 하는 문제일 것이다. 눈으로 마주하는 노을과 뺨을 스치는 바람은 그리 먼 곳에 있지 않다.
임우진 | 건축가. 이론보다 현장을, 현상보다 그 원인을, 그리고 건물 그 자체보다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을 더 깊이 들여다보며 공간과 도시를 만들어왔다. 25년간 파리에서 활동 중이며, 여러 나라에 살면서 체화한 통문화적 시선으로 비판보다는 영감에, 우월함보다는 다양성의 가치에 더 관심이 많다. 이런 관심의 일부를 저서 ‘보이지 않는 도시’에 담아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