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예린 | 전국팀 기자
“네가 문제야.”
살면서 만난 ‘나르시시스트’(자기애성 성격 특성을 가진 사람)는 예외 없이 자주 남 탓을 했다. 자기 실수나 문제도 “다 너 때문”이라고 확신했다. 비난 대상엔 나도 있었다. 불행히도 그들 대부분은 ‘내가 선택하지 않은’ 관계로 묶인 인연이었다. 내가 아닌 상대의 문제인 걸 알아차려도, 늪에서 빠져나오기란 쉽지 않았다. 그중엔 사랑하는 존재도 있었다. 나는 오래 “널 위해 이러는 것”이란 가스라이팅의 덫에 걸려, 쥐처럼 파닥거렸다.
몇 해 전 배신감의 상처가 쓰나미처럼 덮친 때가 있었다. 억울함·분노·슬픔·불안 등의 감정이 휘몰아쳐 괴로웠다. 불면의 새벽 우연히 닿은 것이 ‘자기애성 인격’에 대한 유튜브 콘텐츠였다. 전문가들은 “자기중심적인 성격 특성으로 정서적·물리적 피해를 주는 사람이 있다”고 했다. 나르시시스트 전문가로 통하는 원은수 박사(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는 저서 ‘나에겐 상처받을 이유가 없다’에서 자기애성 인격 특성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다른 사람의 기분(감정)과 필요(요구)를 인식하는 공감 능력이 떨어진다. 자신의 행동이 남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잘 모르고, 그 영향을 과장하거나 축소한다.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낫다고 믿으며, 자신의 중요성을 과대하게 느낀다. 다른 사람들이 자기 기대에 순응하기를 불합리하게 기대한다. 자신을 높은 지위의 사람만 이해하고 교류할 수 있는 존재로 여긴다.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긴다. 자기중심적이다. 과도한 존경과 찬사를 요구한다. 성공·권력·탁월한 재능·아름다움 등 외적인 것에 몰두한다. 다른 사람에 대한 진정한 관심이 적고, 개인적인 이익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 자기 자존감을 높이기 위해 관계를 맺는다. 자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타인을 이용한다.”
14년 동안 기자로서 경험한 세상은 ‘염치없는 자들의 천국’이었다. 한겨레 기자가 되고서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유토피아는 없었다.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는 먼저 산 자들의 확신과 무례에 토할 것 같은 울렁거림이 멈추지 않았다. 위선과 폭력과 방관 앞에 서서 벌벌 떨기만 하는 나 자신이, 쓰레기 같아서 견딜 수 없었다. 정치권이고 운동권이고 언론계고 권력의 안팎을 서성일수록 ‘환멸’은 증폭됐다. 어느 정당에도 어느 단체에도 어느 언론사에도 ‘자존감은 낮고 자기애는 과하고 욕심은 병적인’ 나르시시스트는 존재했다. 아니 너무 많았다. 언론에 보인 모습과 실체가 다른 정치인도, 자기 이상을 위해 동료를 도구 삼는 운동가도, 글과 삶이 천지 차이인 저널리스트도 적지 않았다. 그들은 하나같이 당당했다. 타고난 듯 미안함도 부끄러움도 잘 느끼지 않았다. 선배 세대의 ‘옛 영광의 상처’는 장군복에 달린 훈장처럼 “너희가 화염병 맛을 알아?” 따위의 멸시로 어린 자의 마빡을 때리곤 했다. 아무렇지도 않게.
광주에서 태어나 충청도에서 살아보고서야 겨우 배운 것은 “절대적인 적도 아군도 없다”는 것이다. ‘전라도에선 민주당이 토호’란 인식도 고향 밖에서야 겨우 생겨났다. ‘특정 세력만 해먹는 판’은 썩기 쉽고, 썩은 권력은 ‘악성 나르시시스트’처럼 공동체를 병들게 한다. 능력은 없고 욕심만 많은 나르시시스트에게 칼(권력)을 쥐여줬을 때 어떤 사달이 나는지, 12·3 계엄을 통해 학습하지 않았나. 특히나 지방선거는 우리 일상의 사소하고 구체적인 문제를 대신 맡아 해결해줄 일꾼을 뽑는 선거다.
“이번 지선은 대통령 선거” 따위의 정치적 수사는, 평범한 이들의 판단력을 얕잡아보는 ‘전체주의적 나르시시즘’일 뿐이다. 이제 우리는 더는 ‘나는 누구 편인가’로 해답을 찾기 힘든, 어떤 갈림길에 서 있다. 이제라도 지역민의 고통을 자신의 낮은 자존감을 채우는 도구로 삼는 자가 누군지 똑바로 관찰해야 한다. 지금 내 삶을 바꾸는 한 표를 던져야만 한다. 자유롭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