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는 1974년 10월25일치 사설에서 이렇게 물었다. ‘왜 자유언론을 부르짖는가.’ 그리고 답했다. “자유언론 선언은 언론종사자들의 반성의 소리”이며, “언론자유 문제는 언론 종사자들이 본연의 자세를 되찾고 가다듬어 언론인이 국가와 국민에 지고 있는 스스로의 책무를 다하는 데서 해결된다”고.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묵직한 문장이다. 자유언론실천 선언은 곧 혹독한 대가로 돌아왔다.
폭압적인 권력 앞에서 기자들의 편집권과 국민의 알 권리를 지키려 했던 이들은 하루아침에 일터에서 쫓겨났다. 1975년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조선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동아투위·조선투위) 사건으로 불리는 일련의 사태로 해고된 기자는 145명이다. 당시 30대였던 이들은 팔순을 넘겼지만, 그토록 열망하던 복직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부영 동아투위 위원장은 헌법재판소가 과거의 불의를 바로잡아준다면 “하루만이라도 근무하고 퇴직하겠다”고 말한다(한겨레 4월23일치). 모진 세파에도 시들지 않은 이들에게 자유 언론이란 끝내 돌려받지 못한 ‘존엄’ 그 자체였다.
그들의 투쟁은 우리 현대사에서 언론과 민주주의의 굴곡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당시 기자들은 스스로를 공론장을 지키는 지식인으로 인식했고, 공적 사명감과 지사적 직업의식이 강했다. 이는 ‘역사 앞에 거짓된 글을 쓸 수 없다’는 양심적 저항의 원동력이 되었다. 이후 해직 언론인들은 시민사회와 정치권으로 진출하며 한국 민주화의 한 축이 되었고, 한겨레 창간 등 새로운 언론 질서를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
동시에 이 사건은 언론 자본의 민낯을 드러냈다. 중앙정보부(국가정보원 전신)가 광고주들을 압박해 무더기 광고 해약을 강요했고, 시민들은 빈 지면을 사비로 채우며 저항에 동참했다. 이른바 ‘백지 광고’ 다. 투쟁의 결말은 사주와 경영진이 정권의 압박과 경영난에 굴복해 기자들을 해직하는 것으로 끝났다. 결국 언론인을 거리로 내몬 것은 남산의 검열 기관만이 아니었다. 권력의 눈치를 보며 생존을 택한 언론 자본 역시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1980년대를 거치며 언론은 급격히 기업화되고 거대화되었다. 기자는 더 이상 펜을 쥔 투사나 지사가 아니라 점차 조직화한 거대 미디어 기업의 구성원, 즉 성과와 생존을 요구받는 ‘샐러리맨’이 되어갔다. 1990년대 이후에는 시장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언론 노동의 분업화, 탈숙련화가 가속되고, 편집권은 철저히 자본에 복속됐다. 기자 개인의 양심과 지사적 저항의 동력은 구조적으로 약화할 수밖에 없었다. 언론인 조사에서 언론 자유를 제한하는 가장 큰 위협으로 정치권력보다 자본의 압박을 꼽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이제 언론 자유는 다른 방식으로 위협받고 있다. 여론의 주도권은 플랫폼이 좌우하고, 클릭을 강제하는 알고리즘은 저널리즘의 판단을 흔든다. 언론은 자본과 사주의 눈치를 보고, 진영 논리에 사로잡힌 공중은 언론을 조롱하고 낙인찍는다. 이 혼탁한 난장 속에서 언론 자유를 갉아먹는 것은 더 이상 국가 권력만이 아니다.
50년 전 기자들은 ‘더 이상 침묵하지 않겠다’는 심경으로 궐기했다. 시민들이 사비를 털어 ‘백지 광고’에 ‘격려 광고’로 언론의 방패막이가 되어준 것은 권력에 타협하지 않고 진실을 말하려는 언론인의 양심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자본의 굴레와 플랫폼의 장막 뒤에 선 오늘의 언론은 그 지사적 양심이 여전히 살아 있는지 끊임없이 따져 물어야 한다. 타협하지 않는 저널리즘은 결국 타는 목마름과 자기 성찰 속에서만 살아남을 수 있다.
그들이 단 하루라도 돌아가고 싶어 하는 언론 현장은, 과연 자유로운가.
천현진 | 국립순천대 애니메이션문화콘텐츠스쿨 학술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