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분히 검증되지 않은 인공지능(AI) 시스템 도입으로 중복 비용이 발생하거나 실패로 인한 매몰 비용이 생기지는 않을지 걱정하고 있다.”
자동차부품 제조 중견기업 ㄱ사 임원의 말이다. ㄱ사는 생산 공정의 자동화가 이미 상당 부분 이뤄진 기업이지만, 그는 걱정이 깊다고 했다. 그는 “변화를 위해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지만, 경영 성과로 이어진다는 확실한 보장이 없는 상황 자체가 부담”이라며 “현장에선 검증되지 않은 (로봇을 포함한) 인공지능 기술을 도입했다가 비용만 쏟아붓고, 실패할 수 있다는 의구심을 갖는 구성원들도 많다”고 전했다.
한겨레가 24일 주요 대기업·중견기업 11곳을 대상으로 진행한 ‘인공지능 도입 현황 및 인식 조사’ 결과와 전문가 심층 인터뷰를 종합하면, 제조 현장에서는 피지컬 인공지능 관련 기술을 생산성·품질·안전 개선의 수단으로 보면서도, 높은 초기 투자비와 실패 비용 등을 기술 확산을 가로막는 현실적 장벽으로 지목했다.
이번 조사에서는 피지컬 인공지능을 인간형(휴머노이드) 로봇에 한정하지 않고, 제조 현장의 물리적 공정·설비와 결합하는 인공지능 기반 시스템·설비·로봇까지 포괄했다. 국내 제조기업들이 피지컬 인공지능으로 이어질 수 있는 설비·공정 고도화를 어디까지 준비하고 있는지, 그 과정에서 어떤 어려움을 겪는지를 보기 위해서다.
11개 기업 중 9곳은 향후 12~24개월 안에 자사 공정에 피지컬 인공지능 관련 기술이 도입되는 속도가 확대될 것으로 전망했다. 본격 도입 또는 확대 시점을 3년 이내로 본 곳은 7곳, 5년 이내로 본 곳은 2곳이었다. 응답 기업 다수가 피지컬 인공지능 도입 확대를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이들 기업이 피지컬 인공지능을 도입하려는 목적으로는 ‘생산성 향상’(9곳), ‘품질 안정화 및 불량률 감소’(8곳), ‘안전사고 예방 및 위험작업 대체’(8곳) 등이 꼽혔다.
그러나 도입 의지와 달리 실제 적용은 아직 제한적이었다. 응답 기업 11곳 가운데 6곳은 실증 또는 적용 단계에 들어갔다고 답했지만, 적용 분야는 검사·비전, 이송·물류, 설비점검·예지보전 등 일부 공정에 집중돼 있었다. 경제성 검증도 더뎠다. 11곳 가운데 7곳은 “아직 인공지능의 투자 회수 기간을 산정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인공지능을 도입할 때 맞닥뜨리는 장벽은 대기업의 공급망을 떠받치는 중소·중견기업에 더욱 높을 수밖에 없다. 초기 투자 비용뿐만 아니라, 투자에 실패했을 때에 감당해야 할 부담까지 떠안을 여력이 크지 않기 때문이다. 비용을 지원받을 수 있는 정부 사업도 일정 수준 이상의 생산 규모와 데이터 활용 기반을 갖춘 기업이어야 참여가 가능하다. 실제 산업통상부가 업종별 컨소시엄을 대상으로 추진 중인 ‘산업 에이아이 솔루션 실증·확산 지원’ 사업도 자동차 업종의 경우, 매출 1조원 이상에 자동화율이 70∼80% 수준인 중견기업을 대상으로 시행되고 있다. 전유덕 한국산업기술진흥원 산업혁신본부장은 “중소·중견기업에서 인공지능 도입이 어려운 이유는 기술에 대한 관심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인공지능이 작동할 수 있는 현장 기반이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라며 “생산·품질·설비 데이터가 체계적으로 축적되지 않았거나 수기로 관리되는 경우가 많아, 인공지능 학습에 (이런 데이터를) 바로 쓰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대기업들이 막대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인공지능과 로봇을 결합하며 장밋빛 미래를 그리지만, 제조업의 근간을 이루는 대다수 중소·중견기업이 체감하는 현실은 여전히 녹록하지 않은 것이다.
업계 관계자와 전문가들은 국내 제조 현장에 피지컬 인공지능이 안착하려면 실제 현장에서 검증 가능한 성공사례를 우선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설문에 참여한 기업들도 필요한 정책 지원으로 세액공제·투자 지원, 실증 테스트베드 확대를 주요하게 꼽았다.
현장 데이터의 축적과 활용은 국가 간 제조 경쟁에서도 핵심 변수로 꼽힌다. 신형관 중국자본시장연구소 대표는 “스타트업 중심의 로봇 생태계가 형성돼 있고 사회 전체가 휴머노이드와 데이터 축적에 적극적으로 움직이는 중국과 달리 한국은 데이터가 개별 대기업 안에 갇히기 쉽다”며 “데이터가 스타트업이나 외부 생태계로 흘러가기 어려운 구조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고 짚었다.
안전 인증과 표준 정비도 과제로 남아 있다. 로봇 오작동이 중대재해로 이어질 수 있다는 불안감은 기술 수용성을 떨어뜨릴 수밖에 없다. 산업별 로봇-인간 협업 가이드라인과 안전 인증 체계, 설비·데이터 연동 표준을 서둘러 마련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배경이다. 설문에 참여한 기업들 역시 11곳 중 7곳이 표준·안전 인증 체계와 데이터 표준·연동 가이드를 필요한 정책 지원으로 꼽았다. 고영호 한화오션 팀장은 “자유롭게 공장을 돌아다니는 사족보행 로봇이나 휴머노이드가 인간과 혼재된 환경에서 작업할 때 필요한 안전 기준이나 통신망(배터리, 유틸리티) 표준이 전무한 상태”라고 말했다.
유하영 기자 yhy@hani.co.kr, 이재호 기자 p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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