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재 | 경제사회노동위원회 노사관계제도발전위원장
한동안 삼성전자 성과급을 둘러싼 갈등으로 가슴을 쓸어내렸지만, 여전히 곳곳에서 노사 간 충돌과 갈등이 불거져 나오고 있다. 노동과 고용 문제를 둘러싸고 자본과 노동 진영 간 전선이 거의 모든 영역에 걸치고 있는 느낌이다. 인공지능(AI) 기술 발달로 일자리가 사라질 것 같은 공포감이 엄습하고, 주 4.5일제를 실시하자는 주장에 기업들은 생산성을 어떻게 올려서 대응해야 하나 걱정이 앞선다. 얼마 전 국제노동기구(ILO) 총회에선 음식 배달 등 플랫폼 노동에도 노동권을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이 국제적 반향을 일으켰고, 국내적으로는 저출산·고령화 문제의 해결과 일·가정 양립에 대한 요구가 드높다.
이렇게 여러 쟁점이 어지럽게 불거지는 상황에서는 다시 근본을 따져보고 긴 시간의 흐름을 짚어볼 필요가 있다. 1987년 6월 항쟁으로 열린 민주적 정치 공간에서 ‘노동자 대투쟁’이 발생하였다. 이후 노동자들은 노조할 권리를 획득하였으며, 임금 상승과 노동시간 단축을 경험할 수 있었다. 학자들은 이를 ‘87년 노동체제’로 명명하였다. 87년 노동체제는 1997년 말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커다란 성격 변화를 겪었다. 재벌들은 성장 극대화에서 이윤 극대화로 목표를 바꾸면서 아웃소싱을 통한 노동 비용 절감에 초점을 두었고, 우리 사회는 2000년대 이후 비정규직 증가 등 양극화로 몸살을 앓게 되었다. 87년 노동체제의 가장 큰 특징이었던, 기업별로 파편화된 노사관계는 대기업 중심의 임금 인상을 구조화하였고, 결국 규모 간 임금 격차가 최대 현안으로 떠오르기도 하였다.
이재명 정부의 노동권 강화 정책에 의하여 이제 지불되지 않는 포괄임금은 단속 대상이 되고, 노동 안전을 위한 노력은 전방위적으로 전개되고 있으며, 노란봉투법 제정으로 하청 기업 노동자도 원청 사용자와 마주 앉아 노동조건을 교섭할 수 있게 되었다. 87년 체제가 목표로 했던 노동권 강화는 5인 미만 사업장이나 특수고용, 이주노동 등을 제외하면 이제 상당한 정도로 진전되었다.
결국 남은 것은 일자리의 양과 질에 관한 문제이다. 특히 청년들의 구직난은 인공지능 시대의 가장 큰 쟁점으로 부상하고 있다.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 시장이 활성화되고 기업 경쟁력이 제고되면 파생 수요로서의 고용이 늘어나겠지만, 실제로는 노사관계와 같은 제도적 틀 내에서 시장 원리가 작동하는 것이라서 단체교섭의 제도와 관행을 바꾸는 과제가 매우 시급하고 중요하다. 특히 노동권 확보가 기업 단위로 제약된 결과 규모 간 격차, 정규-비정규직 간 격차가 확대되었다면, 대책은 파편화된 기업별 노사관계를 극복하는 것이어야 한다. 노동시장이 분절되면 노조가 있는 대기업 노동자들조차 양호한 근로조건을 잃을까 우려하여 고용 안정에 더욱 집착하게 되고, 그들만의 성과급을 더 많이 확보하는 데 주력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산별교섭 혹은 초기업 단위 교섭을 활성화해야 한다는 노동계의 주장은 이미 30년이 넘었지만, 의사 결정의 제약을 두려워한 사용자의 반발 속에 한 발자국 디디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그렇다고 초기업 단위 교섭을 법이나 정부 정책으로 강제하는 것은 쉽지 않으며, 노사가 새로운 질서에 대한 필요성에 공감해야만 진척될 수 있는 과제이다. 사용자 입장에서도 초기업 단위 교섭은 유럽 사례가 보여주듯이 임금 경쟁 완화와 인재 유출 감소, 갈등과 교섭 비용 절감 등 이점이 충분하지만,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길에 대한 두려움이 크다. 이를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정부와 학자들의 역할이 필요하다. 또한, ‘무늬만 산별’이라는 비판을 받아온 노동계 역시 기업 단위 이해관계를 넘어 산업 전체의 지속가능성과 청년 고용 문제에 더 큰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인공지능이나 탈탄소화로 인한 일자리 전환과 숙련의 재구성 역시 개별 기업이 아니라 산업과 지역 단위에서 대응해야 한다는 점에서 초기업적 노사관계의 필요성은 더욱 커지고 있다. 이제 노사관계의 틀을 바꿀 때가 되었다. 87년 노동체제가 97년 외환위기를 만나 이중화, 금융화, 유연화가 극한까지 발현되었다면, 이를 극복할 수 있는 사회적 대화가 활성화되어야 한다. 마침 경제사회노동위원회가 ‘사회적 대화 2.0’을 선언하고 산하 의제별 위원회로 노사관계제도발전위원회를 출범시켰기 때문에 기대감을 갖게 된다. 87년 노동체제가 노동권 확대의 시대였다면, 앞으로의 노사관계는 노동시장 분절을 극복하고 산업 전환에 공동 대응하는 새로운 연대의 시대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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