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은 영웅들이 만들어낸 가장 인간적인 순간, 그 따뜻한 이야기를 기록합니다.
"장애인 부부가 겁에 질려 있었어요."
나영흠(38)씨는 지난 19일 밤 눈앞에 펼쳐졌던 그 순간을 다시금 떠올렸다. 밤 11시 30분쯤 약속을 마치고 귀가하려 지하철 2호선 강남역 승강장에 들어선 나씨는 만취한 채 난동을 부리는 한 남성을 목격했다. 50대로 추정되는 이 취객은 지하철을 기다리던 시민들에게 시비를 걸기 시작했다.
그러다 취객의 시선이 휠체어에 탄 장애인 부부에게 머물렀다. 그는 부부 앞에 쪼그려 앉아 위협적으로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겁에 질린 부부가 휠체어를 뒤로 물렸지만, 취객은 집요하게 이들에게 다가갔다.
상황을 주시하고 있던 나씨는 당일 비가 와서 들고 있던 검은색 장우산을 치켜들며 취객 앞을 막아섰다. 다행히 취객은 더 이상 다가오지 못했고, 부부는 안도하며 막 도착한 지하철에 탑승했다.
그러나 상황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취객이 부부를 따라 지하철에 올라탄 것이다. 그는 객차 안에서도 다른 승객들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위협을 이어갔다. 노란색 상의를 입은 남성에게 다가가 "야, 이 뚱땡아"라며 폭언을 한 취객은, 이내 타깃을 바꾼 듯 지하철 칸 맨 끝에 자리잡은 장애인 부부에게 다시 접근했다.
취객은 부부 앞에 서서 지하철 손잡이를 잡은 채 위협적인 언사를 이어갔다. 공포에 질린 부부가 다음 역에서 서둘러 내리려던 찰나, 장우산을 든 나씨가 다시 한 번 구세주처럼 나타났다. 나씨는 접은 우산을 방패처럼 들어 올려 취객을 가로막았다. 취객이 이를 밀치며 막무가내로 다가오려 하자 온몸으로 그 앞을 방어했다.
조금 전 폭언을 들었던 노란색 상의의 남성도 힘을 보탰다. 두 사람은 부부 앞에 서서 우산으로 방어막을 쳤고, 취객은 결국 3m 밖으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이 만들어 준 안전지대 안에서 부부는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나씨는 "바로 경찰에 신고했다. 주위에 다른 분이 또 신고를 해주셨는지 경찰이 생각보다 빨리 왔다"며 "경찰이 취객을 데리고 내리는 모습까지 확인하고 경계를 풀었다"고 했다.
나씨도 목적지에 다다라 내리려고 문 앞에 섰을 때 장애인 부부가 다급히 그를 불러 세웠다. 그리고는 자신들의 목에 걸려 있던 작은 카드를 보여줬다. 카드에는 한글로 "저는 대만인입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그제야 이들이 외국인 관광객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나씨는 미안한 마음이 앞섰다. 한국에서 좋은 추억만 쌓아가야 할 여행객들이 이런 일을 겪게 된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려 대신 "죄송하다"며 고개를 숙였다. 나씨는 평소 남 앞에 나서는 성격이 아니었지만, 당시 너무나 겁에 질려 있던 부부를 외면할 수 없었다고 회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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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걱정할까 봐 하루가 지나서야 이 일을 털어놓은 나씨는, 얼마 후 아내를 통해 뜻밖의 소식을 들었다. 아내가 SNS(소셜미디어)에서 당시 도움을 줬던 한국인 남성들을 간절히 찾고 있다는 대만인 부부의 글을 발견한 것이다.
지난 21일 무사히 대만으로 귀국한 부부는 "당시 너무 무서웠는데, 겁에 질린 저희에게 두 분의 도움은 세상을 다 가진 듯한 엄청난 위로와 힘이 되었다"며 나씨와 노란색 상의 남성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고 싶다고 했다.
이 소식을 들은 나씨는 댓글을 통해 자신을 '연우 아빠'라고 밝히며 "좋은 추억 많이 만들고 가셔야 할 여행지에서 이런 불편함을 겪게 해드려 죄송하다"며 앞으로 부부의 앞날에 행복만 가득하기를 빌었다.
이에 부부는 "다시 한 번 그날의 용기에 진심으로 깊은 감사를 드린다. 단순한 도움이 아니라 큰 감동이었다"며 "연우 아버님 같은 멋진 분 덕분에 저희는 한국에서 평생 잊지 못할 따뜻한 추억을 안고 귀국했다"고 했다. 나중에 아이와 함께 대만으로 가족 여행을 오게 된다면 꼭 연락해 달라며 기쁘게 보답하겠다는 약속도 덧붙였다.
실제 대만 여행을 계획하고 있었으나 16개월 된 아기 때문에 아직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는 나씨는 "나중에 기회가 되어 대만에 가게 된다면 꼭 연락해 볼 생각"이라며 소중한 인연으로 이어질 뜻깊은 만남을 기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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