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계 없는 정년 연장은 갈등을 부른다 [청계광장/이정식]
머니투데이
연공급제 둔 채 연장은 고임금구조 고착
성과 무관한 일률적 임금피크제도 문제
'전환형 정년연장 모델' 설계, 확산해야
정년 65세 법제화가 눈앞의 현실로 다가왔다. 인구 구조의 시계는 누구의 사정도 봐주지 않고 빠르게 흐른다. 베이비붐 세대의 대규모 은퇴와 국민연금 수급 연령의 미스매치로 발생하는 '소득 공백'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다. 정년 연장은 선택이 아니라 시간의 문제다. 이제 중요한 것은 "언제, 어떻게, 어떤 속도로 할 것인가"다.
그러나 노동시장과 기업의 시계는 전혀 다른 속도로 움직인다. 한국의 임금체계는 여전히 연공급 중심이다. 이 구조를 그대로 둔 채 정년만 5년 연장하는 것은 고임금 구간을 5년 늘리는 것과 다르지 않다. 노동계는 임금 유지와 일괄 상향을, 경영계는 재고용과 임금 조정을 주장하며, 청년층은 신규 채용 축소를 우려한다. 누구의 주장이 틀렸다고 보기는 어렵다. 다만 지금 방식으로는 충돌을 피하기 어렵다.
가장 먼저 넘어야 할 벽은 일률적 임금피크제다. 일정 연령이 되면 직무와 무관하게 임금을 깎는 방식은 수용성과 성과 모두에서 한계를 드러냈다. 같은 일을 하면서 임금만 줄어드는 구조는 자존감을 훼손하고 생산성 저하로 이어진다. 이는 비용의 문제가 아니라 노동의 존엄에 관한 문제다.
해법은 '감액'이 아니라 '전환'에 있다. 정년 연장 구간을 기존 직무의 연장이 아니라 새로운 역할로 이동하는 과정으로 설계해야 한다. 노동시간을 단계적으로 줄이고, 숙련 전수·멘토링·품질·안전관리 등 경험 기반 직무로 재배치하며 이에 맞춰 임금 구조를 조정하는 방식이다. AI와 자동화는 이러한 전환을 뒷받침할 수 있다. 다만 모든 산업에 일괄 적용하기보다 가능한 영역부터 단계적으로 확대해야 한다.
문제는 이러한 전환이 시장의 자율에만 맡겨져서는 작동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교섭력 격차가 큰 현실에서 자율은 쉽게 불균형으로 흐른다. 따라서 정부의 정교한 정책 설계가 전제돼야 한다. 첫째, '전환형 정년연장 모델'의 표준화와 확산이다. 직무 재설계와 노동시간 단축이 결합된 업종별 모델을 제시하고 이를 도입하는 기업, 특히 중소기업에 세제와 재정 지원을 집중해야 한다.
둘째, 실효성 있는 맞춤형 재교육 체계다. 형식적 교육을 넘어 실제 직무 이동으로 이어지도록 지역 기반 훈련 인프라와 산업별 협력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셋째, 최소한의 공적 가이드라인 확립이다. 임금 조정 범위와 전환 절차, 보호 장치에 대한 기본 원칙을 제도화해 현장의 불확실성과 분쟁을 줄여야 한다. 넷째, 고용보험과 연금 등 거시적 제도와의 정합성 확보와 비용 분담이다. 정년연장이 기업의 부담으로만 전가되지 않도록, 사회보험 체계 및 정부 재정이 맞물리는 통합적 설계가 병행되어야 제도의 지속 가능성이 담보된다.
정년연장 논의는 청년 일자리 문제와도 연결된다. 올해 초 국가통계에서 특별한 이유 없이 '그냥 쉬었음'이라고 답한 20·30대가 70만 명을 넘어섰다. 취업 의욕 자체를 잃은 청년들이 그만큼 많다는 뜻이다. 이런 현실에서 정년연장이 청년 채용의 문을 더 좁힌다는 우려도 가볍게 볼 수 없다.
상생은 선언이 아니라 설계의 문제다. 고령자의 노동시간 단축과 연계한 청년 채용 인센티브를 통해 세대 간 대체 효과를 완화하고, 고령 인력이 청년의 성장을 돕는 멘토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물론 모든 것을 법으로 정할 수는 없다. 정부는 이처럼 거시적 정합성과 비용 분담의 원칙을 제시하고, 현장의 구체적 선택은 노사가 자율로 맡아야 한다. 다만 자율은 상생의 조건이 갖춰질 때 비로소 작동한다. 업종과 기업별로 다양한 전환 모델을 만들어가는 과정 자체가 우리 노동시장의 산업자치를 다지는 기반이 될 것이다.
정년연장은 피할 수 없다. 그러나 설계 없는 연장은 또 다른 갈등을 부를 뿐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나이를 늘리는 결단이 아니라 일하는 방식을 바꾸는 설계다. 그 설계 없이 두 시계를 맞추는 일은 불가능하다.
![]()
조회 0·스크랩 0·공유 0
댓글이 없습니다.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