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고운 | 부산 엠비시 피디
처음으로 겪었던 인종차별은 프랑스 파리를 여행할 때였다. 자전거를 탄 십대들이 길을 걷고 있는 친구와 나를 향해 ‘칭챙총’, ‘니하오’ 같은 말을 크게 외치며 지나갔다. 그때 느꼈던 불쾌한 감정을 여전히 기억한다. 종종 에스엔에스(SNS)에서 비슷한 경험을 했던 이들의 이야기를 접한다. 최악의 인종차별 경험, 인종차별에 맞서 시원하게 대응하는 방법, 차별주의자를 향한 냉소적인 유머가 오가는 가운데, 가해의 경험을 공유하는 사람은 없다. 우리는 모두 무의식적으로 스스로를 차별과는 거리가 먼, 무결한 인간으로 믿고 싶은지도 모른다.
최근 남편이 일하는 충남 아산에 자주 가게 되면서, 그런 믿음이 온전한 착각임을 깨닫게 됐다. 어느 토요일 오후에 숙소 앞에서 산책하다가 마주치는 이웃 중 다수가 한국어를 쓰지 않는 아시아계 외국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놀라게 되면서다. 편의점에서 라면을 먹으며 러시아어로 수다를 떠는 아이들이나 근처 대형마트에서 포인트 적립을 위해 전화번호 뒷자리를 부르고 있는 외국인을 볼 때면, 낯선 감정이 밀려들었다. 저 사람들은 어디에서 무슨 이유로 이곳에 왔을까 하는 호기심과 외국 사람에 대한 막연한 경계심, 낯선 풍경에 대한 어색함 같은 게 뒤섞인 복잡한 감정이었다. 어쩌면 나는 외국인이 많은 동네 풍경을 ‘자연스럽지 않다’고 느꼈는지도 모른다.
정말 그럴까. 행정안전부가 발표한 ‘2024 지방자치단체 외국인 주민 현황’에 따르면, 한국에 거주하는 외국인 주민 수는 모두 258만3626명으로 인구주택총조사 기준 우리나라 총인구의 5%를 차지한다. 아산시가 속한 충청남도의 경우, 총인구 대비 외국인 주민 비율이 이보다 높은 7.6%다. 외국인 주민이 많은 동네가 생기는 것도 자연스럽다.
아산에서 느꼈던 감정에 대해 생각할 때면, 전성진 작가의 산문집 ‘베를린에는 육개장이 없어서’에서 읽었던 문장이 떠오른다. 어느 날, 작가는 베를린에서 함께 사는 룸메이트 요나스에게 자신이 겪은 인종차별 경험에 대해서 털어놓는다. 나치와 극우를 혐오하는 진보주의자인 요나스는 그건 차별이 아니라고 부정한다. 작가는 이렇게 쓴다. ‘나에게 인종차별은 방금의 요나스다. 평범한 사람이자 삶의 어느 순간에서든 자신의 편견에 걸려 넘어지는 사람 말이다.’ 아산의 한 동네에서 나 또한 요나스였던 순간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인종차별 앞에 온전히 무결한 한국인이 있을 수 있을까. 우리는 모두 마음속에 차별의 씨앗을 품고 산다. 그것들은 미디어가 쏟아내는 외국인 범죄에 대한 뉴스, 외국인 노동자를 희화화하는 개그, 외국인 이웃을 동정이나 혐오의 대상으로 보는 관점을 접하며 우리 안에 조용히 심기었을 것이다. 낯선 동네에서 내가 느낀 불편한 감정들 또한 거기서 출발한 게 아니었을까.
그때 내 얼굴은 어땠을까. 내게 불쾌감을 안겼던 차별주의자의 얼굴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차별은 명백한 악의보다는 게으른 무지와 방치된 편견의 얼굴을 하고 올 때가 많다. 평등이라는 가치에 대해 배웠던 순간부터, 나는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고 믿으며 살아왔다. 하지만 믿음과 달리, 나는 언제라도 내 안의 편견에 걸려 넘어질 수 있는 사람이다. 그건 몹시 부끄럽고 무서운 일이다.
앞으로도 나는 자주 이런 순간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평생을 한국에서 살아온 내 안에 심어진 차별의 씨앗이 오직 이것들뿐일까. 결점 많은 인간으로서 할 일은 그저 매 순간 정신을 똑바로 차리는 것. 무지와 편견을 방패 삼아 차별을 일삼는 못난 이웃이 되지 않으려면, 스스로 옳다고 믿는 가치를 실천하기 위해 부단히 애써야 할 것이다. 부끄러움과 두려움을 피하려 하지 않으며. 이게 위선이라면, 기꺼이 위선자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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