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은 온몸으로 불어온 바람의 방향과 계절의 습도, 흙 위를 스쳐간 빛의 결까지도 조용히 품은 채 자신의 시간을 축적한다. 하지만 인간은 기억이라는 이름 아래 자기 중심적인 것들만 쌓는다. 그러기에 종종 우리는 자연을 통해 우리의 기억과 감각을 교정해 나가야 한다. 6월 2일부터 25일까지 서울 통인화랑에서 열리는 석철주 초대전은 바로 그 기억과 감각의 층위를 살펴 볼 수 있는 자리다.
이번 전시에선 대표 연작 ‘신몽유도원도’와 ‘자연의 기억’을 보여준다. 화면 속 산은 실재의 풍경이면서도 동시에 기억 속 잔상에 가깝다. 또렷하게 재현된 산이 아니라, 눈을 반쯤 감았을 때 아른거리는 감각의 풍경이다. 옅은 청색과 옥빛, 핑크와 흰색이 겹겹이 스미며 만들어내는 산세는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흐린다. 풍경은 특정 장소를 가리키지 않는다. 오히려 보는 이 각자의 내면 속에 잠들어 있던 어떤 기억과 감정을 환기시킨다.
석철주 회화에서 중요한 것은 단순한 묘사가 아니라 ‘배어나옴’의 감각이다. 그는 화면 위에 이미지를 덧그리기보다 물과 안료가 스스로 흔적을 드러내도록 기다린다. 흰색 물감이 마르기 전 물을 흩뿌리고, 젖은 표면을 붓으로 쓸어내리며 형태를 생성한다. 산의 능선과 골짜기, 안개와 운무는 그렇게 의도와 우연 사이에서 천천히 떠오른다. 작가는 물이라는 가장 유동적이고 붙잡을 수 없는 재료와 끊임없이 대화하며 화면을 완성한다. 그의 그림에 스민 촉촉한 결은 바로 그 기다림과 허용의 시간에서 비롯된다.
‘자연의 기억’ 연작에서는 들풀과 들꽃, 화분 속 식물과 무 같은 소박한 존재들이 등장한다. 화려하지 않기에 쉽게 지나치게 되는 것들이다. 대지의 흙을 뚫고 씨앗이 움트며 이윽고 줄기와 잎사귀로 바뀌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가는 기억을 되살리는 것이다. 죽필을 이용하여 화면을 긁어내서 내부의 색이 배어나오는 방법으로 기억을 더듬고 재구성하여 무한한 자유와 상상의 나래를 달아준다. 우리로 하여금 생명이 움트는 생생한 소리에 다시금 귀 기울이게 만든다.
어린 시절 서촌에서 청전 이상범을 만나 그림의 길로 들어선 작가는 전통 산수화의 정신을 계승하면서도 서구 현대미술의 재료와 방식을 적극적으로 탐구해왔다. 캔버스 위에 아크릴을 사용하지만, 화면은 마치 한지에 먹이 번지는 듯한 깊고 은은한 숨결을 품는다. 채움과 비움, 드러남과 사라짐, 우연과 의도가 교차하는 그의 작업은 단순한 풍경화가 아니라 자연과 인간, 기억과 시간에 대한 철학적 사유에 가깝다.
무엇보다 그의 그림은 우리에게 잠시 멈추어 서서 잊고 있던 감각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희미해진 자연의 기억, 그리고 인간 안에 남아 있는 본래의 감각들. 화면 위에서 번지고 스미는 물성은 결국 삶을 대하는 태도와도 닮아 있다. 석철주의 그림은 어떤 거대한 선언보다 조용한 방식으로 우리 안의 감각을 다시 깨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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