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족감 100% 한탄강 주상절리길
북녘땅 보이는 소이산 전망대
양구 백토 달항아리에 홀리고
시래기 비빔밥에 행복감 포만
봄이 왔다. 내가 사는 파주에는 봄이 조금 늦게 온다. 식목일이 지나야 겨울 패딩을 세탁소에 맡길 수 있다. 봄이 되어서인지, 몸과 마음의 컨디션도 조금씩 올라오고 있다. 며칠 전부터 하루 2만보 걷기를 다시 시작했고, 재즈와 일본어 공부도 다시 하고 있다. 저녁에는 간단한 요리를 만들어 와인 한잔과 함께 먹으며 야구 경기를 본다. 다행히 롯데 자이언츠도 연패에서 벗어나 슬슬 상승세를 타고 있다. ‘산책·독서·음악·요리’. 나는 이 네가지만 꾸준히 하면 웬만한 불행은 피해 갈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이 네가지를 ‘불행 방지 4종 세트’라고 부른다. 여기에 하나를 더해 ‘5종 세트’로 만든다면, 추가해야 할 건 ‘여행’이 아닐까? 그래서 나는 지난겨울의 우울에서 ‘확실히’ 벗어나기 위해 여행을 감행하기로 했다.
이 봄, 비틀스와 혁오, 빌 에번스, 셀로니어스 멍크를 들으며 어딘가로 가보자. 자, 어디로 가볼까? 지도를 들여다보는데 철원이 보였다. 철원? 철원에는 뭐가 있지? 노동당사와 한탄강이 언뜻 떠올랐다. 아주 오래전 가본 적이 있는 것 같았는데, 세세한 풍경은 기억나지 않았다. 철원 옆으로는 양구가 보였다. 양구? 양구는 아직 한번도 가보지 않은 곳이다. 양구엔 뭐가 있지? 아, ‘박수근미술관’이 있구나. 그의 그림은 한번도 본 적이 없다. 오호, 가보자. 한탄강도 보고, 박수근미술관에도 가보고. 그렇게 놀다가 오자.
주상절리길 절경에 입이 떡
한탄강 주상절리길에 관한 기사를 몇번 본 적이 있다. 언젠가 한번은 가봐야지 했는데 비로소 가게 됐다. 한탄강에는 용암이 만든 풍경인 주상절리를 보며 걸을 수 있는 잔도가 만들어져 있는데, 개장하자마자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오늘 걷기는 주상절리길로 때우자. 나는 드르니마을 매표소로 입장했다. 와! 만족감 100%! 걷는 내내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의 비경이 펼쳐졌다. 벼랑을 끼고 허공에 철제 로프가 이어지게 한 반원형 길을 낸 스카이워크도 있었다. 바닥이 유리라 발아래로는 굽이치는 강물이 보였다. 다리가 살짝 후들거렸다. 사실 나는 약간의 고소공포증이 있다. 내 옆의 아주머니들은 겁이 나지 않는지 신나게 떠들며 사진을 찍었다. 그 모습을 보며 나 역시 누군가와 같이 왔다면 겁을 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마음속으로 변명을 했다.
잔도를 걷고 나와서는 고석정에 들렀다. 임꺽정이 활동했던 곳이라고 하는데, 아니나 다를까 입구에 커다란 임꺽정 동상이 서 있었다. 그런데 고석정보다 내 관심을 더 끈 건 고석정에서 걸어서 5분 거리에 있는 ‘작은 농업전시관 호미뜰’이었다. 옛날 농기구와 생활 도구 등을 전시하는 곳이다. 키, 홀태(벼훑이), 구유, 써레 등을 보며 ‘어, 어, 이건 나도 어릴 때 사용해본 건데?’ 하면서도 ‘아, 이젠 내가 이런 걸 보며 감탄하는 나이가 됐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조금은 씁쓸하기도 했다.
점심으로는 막국수를 먹고, 시간이 조금 남아 소이산에 갔다. 해발 362m의 야트막한 산이지만 정상에 서니 철원평야와 옛 시가지의 흔적, 휴전선 너머 북한 땅까지 한눈에 보였다. 옛 철원역을 재현한 곳에서 모노레일을 타고 갔다. 정상 전망대에는 문화해설사가 있어 자세한 설명도 들을 수 있었다. “저기가 백마고지예요. 중공군이 새까맣게 몰려들었죠. 포탄이 30만발이나 터졌고, 국군 3천여명, 중공군 1만4천여명이 전사했다고 합니다.”
소이산에서 내려와서는 상점가에서 맷돌 커피를 마셨다. 철원에는 현무암 맷돌로 커피를 직접 갈아 마시는 맷돌 커피가 있다고 해서 기대감을 품고 시도했다. 맷돌에 커피콩을 넣고 ‘맛있어라 맛있어라’ 주문을 외면서 ‘어처구니’를 돌렸다. 철원 숙소는 고석정이 내려다보이는 호텔이었다. 여행에서 좋은 기분을 계속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은 괜찮은 호텔에 묵는 것이다. 낮 내내 잘 놀았더라도 호텔이 엉망이라면 기분이 순식간에 나빠진다. 다행히 호텔은 너무 좋았다.
직접 본 박수근 그림에 감동
다음날 양구에서의 첫 일정은 박수근미술관이었다. 박수근은 1914년 강원도 양구군 양구읍 정림리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교과서에 실린 그림만 보다가 직접 보기는 처음이었다. 책에서 보던 것과는 그림의 질감이 확실히 달랐다. 역시 그림이든 무용이든 사진이든, 직접 봐야 제대로 느낄 수 있다니까. 유명한 빨래터 그림 밑에는 박수근이 아내에게 보냈다는 연애편지가 보였다.
‘빨래터에 가서 당신을 자세히 보고 아내로 맞아들이기로 마음으로 결정했습니다. 나는 그림 그리는 사람입니다. 재산이라곤 붓과 팔레트밖에 없습니다. 당신이 만일 승낙하셔서 나와 결혼해주신다면 물질적으로는 고생이 되겠으나 정신적으로는 당신을 누구보다도 행복하게 해드릴 자신이 있습니다. 화가의 아내가 되어주시지 않겠습니까?’ 아, 정말이지 낭만 가득한 시대였군. 요즘 시대에도 과연 “화가의 아내가 되어주시지 않겠습니까?” 하면서 고백할 수 있을까?
미술관 앞에는 박수근 화백의 동상이 있었다. 서울 창신동 집에서 촬영한 사진 속 모습 그대로라는데, 무릎을 접은 채 두 손을 맞잡고 있는 그의 표정은 더없이 평화롭고 온화했다. 나는 이런 표정을 가지고 싶구나.
오는 길에 양구 백자박물관에 들렀다. 양구가 백자의 고장이라는 건 이번에 처음 알았다. 옛날부터 양구에는 백자를 만드는 원료인 백토가 많이 났다고 한다. 고려와 조선 시대 백자를 볼 수 있는 전시관도 좋았지만 감탄이 나오는 곳은 현대백자실이었다. 양구 백토를 이용하여 만든 현대 백자가 전시되어 있었는데,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달항아리를 비롯해 백자의 진면목을 만날 수 있는 작품 앞에서 발길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나중에 돈을 벌면 꼭 달항아리를 하나 사야지 하고 마음먹었다.
박물관을 나와 시래기 음식점에 들러 밥을 먹었다. 양구는 시래기로 유명하다. 시래기나물을 듬뿍 넣고 비빔밥을 만들어 먹었다. 마음껏 먹고 행복감을 가득 느꼈다. 얼마 전 미즈노 남보쿠의 책 ‘결코, 배불리 먹지 말 것’을 읽었는데, 거기에는 “식사를 절제하는 자는 아무리 관상이 흉해도 반드시 운이 열린다”고 적혀 있었다. 음, 그건 일상생활에서나 그렇지, 여행에서는 마음껏 먹어야지. 뭐 이렇게 생각해버리고 말았다.
운전을 해 집으로 돌아오는 길 창밖으로 연두색으로 가득 물든 가로수들이 쓱쓱 스쳐 지나갔다. 이번 여행은 뭐랄까, ‘아, 이 정도면 즐거웠다’ 하는 생각이 든 여행이었다. 삶은 생각할수록 비극이지만, 그래도 즐겁게 살려고 마음을 먹으면 즐거운 게 꽤 많다. 막국수, 미술관, 달항아리 같은 것들 말이다. 인생에서는 즐거움을 많이 느끼는 자가 결국 승자다.
B급 음식
철원에서 막국수를 먹은 곳은 ‘풍전면옥’이다. 갈말읍 풍전길에 있는 이 식당은 옆에 방앗간이 있어 직접 메밀을 빻아 면을 뽑는다. 비빔막국수를 시켰는데 면의 양이 푸짐하고 고명도 넉넉했다. 메밀 함량이 높은 면이라 씹으면 특유의 묵직하고 까끌까끌한 식감이 살아 있다. 여기에 메밀전병도 하나 시켜야 한다. 메밀 반죽에 김치와 잡채를 넣고 돌돌 말아 부쳐 내는데, 고소한 맛이 막국수와 잘 어울린다. 야들야들 잘 삶은 수육도 꼭 맛보시길. 아침 6시부터 문을 여니 이른 아침에 출출할 때 찾아가도 좋겠다. 마당이 넓고 강아지 한마리가 졸고 있는 풍경이 평화롭다. 직접 재배한 채소로 음식을 만든다니 인심도 미더움도 넉넉한 집이다.
양구 하면 시래기다. 양구군 해안면은 해발 400~500m의 고산 분지로 ‘펀치볼’이라 불린다. 한국전쟁 때 종군기자가 위에서 내려다보니 화채 그릇(Punch Bowl)처럼 생겼다 해서 붙은 이름이다. 이곳의 시래기는 분지 안에서 맴도는 매서운 바람에 낮에 녹고 밤에 어는 과정을 60일 넘게 반복하며 자연 건조된다. 그래서 일반 시래기보다 부드럽고 질기지 않다. 시래기 전용 품종의 무를 심어 뿌리보다 무청을 무성하게 키운다는 것도 이곳만의 방식이다. 매년 가을에는 ‘펀치볼 시래기 사과 축제’가 열릴 정도로 양구를 대표하는 특산물이다. 내가 시래기 음식을 먹은 곳은 ‘시래원’. 농촌진흥청이 인정한 농가맛집이다. 국토정중앙천문대로 향하는 길목의 조용한 시골 동네에 자리하고 있다. 시래기소불고기정식을 시키면 시래기밥을 비롯해 시래깃국, 시래기나물 등 각종 반찬이 한상 가득 차려져 나온다. 양념간장을 넣고 알차게 비비면 밥 한공기 뚝딱이다.
‘양구재래식손두부’에도 들렀다. 중소벤처기업부가 인증한 ‘백년가게’다. 양구산 콩만을 고집하며 매일 새벽 가마솥에서 재래식 방법으로 두부를 만든다. 대표 메뉴인 두부전골을 시켰는데, 두부가 입안에서 녹듯이 사라졌다. 콩 특유의 고소함이 진하게 남는다. 들기름두부구이도 꼭 시켜야 한다. 들기름에 지져낸 두부의 겉은 바삭하고 속은 보들보들하다. 청국장도 된장 맛이 깊다. 양이 푸짐하고 값도 착해서 마음 편하게 배를 채울 수 있는 집이다.
최갑수 여행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