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뉴스) 김정선 선임기자 = 조선 왕실에서 가족은 중요한 의미를 가졌다. 그 존재가 정통성과 권위를 보여주기도 하지만, 때로는 이 때문에 권력 다툼을 벌이기도 했다. 왕실 가족 간의 힘의 우위는 신하나 외척 등의 지위에 변동을 일으켰다. 무엇보다도 이들의 역학 관계는 백성들의 삶에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문정왕후의 태릉 [촬영 김정선]
어린 왕이 즉위할 때는 왕실에서 가장 큰 어른인 대비가 수렴청정을 했다. 문정왕후는 아들 명종이 12세에 왕위에 오르자 8년간 수렴청정을 펼쳤다. TV 역사 드라마나 교양 프로그램 등을 통해서 문정왕후가 권력을 휘두르는 모습이 묘사되기도 했다. 문정왕후는 수렴청정이 끝난 후에도 외척들과 함께 영향력을 떨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문정왕후는 중종의 세 번째 왕비였다. 중종이 세상을 떠난 뒤 능은 두 번째 왕비였던 장경왕후의 능 주변에 조성됐다. 하지만, 문정왕후가 남편의 능 옆에 묻히기를 원하면서 중종의 능은 현재의 고양 서삼릉에서 서울 강남으로 옮겨졌다. 국가유산청 궁능유적본부 누리집에 따르면 중종의 능인 정릉은 지대가 낮아 비가 오면 피해가 자주 일어났고, 문정왕후는 지금의 노원구 태릉에 홀로 묻히게 됐다.
명종과 인순왕후의 강릉 [촬영 김정선]
명종실록에는 막강한 위세를 떨친 문정왕후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1565년 4월 6일 기사의 일부다. "사신(史臣)은 논한다. 윤씨는 천성이 강한하고 문자를 알았다. (중략) 스스로 명종을 부립(扶立)한 공이 있다 하여 때로 주상에게 '너는 내가 아니면 어떻게 이 자리를 소유할 수 있었으랴' 하고, 조금만 여의치 않으면 곧 꾸짖고 호통을 쳐서 마치 민가의 어머니가 어린 아들을 대하듯 함이 있었다." 여기에서 '부립한 공'은 아들 명종을 왕위에 세운 공을 뜻한다.
문정왕후는 강력한 권력자로서의 모습이 후대에 강조됐고, 명종은 대체로 문정왕후의 그늘 속에 있는 미약한 왕의 이미지를 갖게 된 것 같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선 명종에 대해 "문정왕후 사후 선정을 펴보려고 노력했으나 실패하고 34세의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했다"고 설명한다.
태릉은 후대 사람들이 갖는 문정왕후의 이미지와 닮았다. 무덤을 지키는 문석인(문인 모습의 석물)과 무석인(무인 모습의 석물)은 웅장하고, 봉분 주변에는 병풍석과 난간석이 함께 있어 화려하게 느껴진다. 이곳의 석물은 다른 능에 비해 크기가 장대한 조선 중기의 특징을 보여준다고 한다.
인근에는 명종과 인순왕후의 능인 강릉이 자리하는데, 도로변 인도를 따라 걸어 가면 1.3㎞ 정도 떨어져 있다. 역사의 기록상으로도 거리가 있어 보이는 이들 모자의 관계를 개선할 수는 없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최근 이곳을 방문했을 때 도로변 인도를 20여분 걸어 강릉까지 가는 관람객들을 볼 수 있었다. 정자각에서 바라본 강릉의 석물도 규모가 컸다. 태릉과 강릉 전체 능역의 옛 모습은 알 수 없지만, 공간이 넓고 별도의 '조선왕릉 전시관'이 있는 문정왕후의 태릉 쪽에 관람객이 더 많았다.
jsk@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