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딸 김주애의 공개 활동이 빠르게 늘어나며 후계 구도에 대한 관측이 확산하는 가운데, 조기 부상이 오히려 체제 내부 불안 요인이 될 수 있다는 분석이 제기됐다. 국가정보원이 최근 김주애를 사실상 후계 단계에 진입한 인물로 평가한 상황에서, 정 박 전 미 국무부 동아태 부차관보는 후계 ‘서사 구축’이 본격화되는 동시에 엘리트 권력 구조에 새로운 긴장을 유발할 수 있다고 평가했다.
27일(현지시각) 미국 워싱턴 브루킹스연구소에서 열린 ‘북한의 권력·종교·이데올로기’ 토론회에서 정 박 전 부차관보는 김주애의 최근 행보에 대해 “미사일 시험과 경제 현장 등 핵심 행사에 동행시키며 후계 준비를 위한 메커니즘을 구축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정 박은 중앙정보국(CIA)과 국가정보위원회(NIC)에서 고위직을 지낸 북한 전문 정보 분석관 출신으로, 이후 국무부 동아태 담당 부차관보로서 미국의 대북 정책을 총괄한 최고위 실무 당국자였다.
김주애는 최근 군사 훈련과 전략무기 관련 행사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며 존재감을 키우고 있다. 특히 탱크 조종 장면 공개 등은 김정은이 과거 후계 시절 보여줬던 군사적 이미지를 연상시키는 연출로 평가된다. 국가정보원도 이를 두고 “김정은 후계 시절을 오마주한 형태로 군사적 비범성을 부각하려는 의도”라며 “여성 후계자에 대한 의구심을 희석하고 후계 서사 구축을 가속하려는 포석”이라고 분석한 바 있다. 또한 국정원은 김주애가 지난해 말부터 의전 서열 2위 수준으로 위상이 격상됐다고 보고 있다.
정 박은 다만 이러한 공개적 후계 구도가 위험 요인이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과거 김씨 일가가 후계를 섣불리 드러내지 않으려 했던 이유가 엘리트들의 줄서기와 파벌 형성을 막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김정은이 현재 노선을 바꿀 경우 특정 후계자를 중심으로 재편된 엘리트들의 움직임 전체를 되돌려야 하는 상황이 오고, 이것이 민감한 후계 국면에서 심각한 균열로 이어질 수 있다는 분석이다. 조기 부상이 되돌리기 어려운 구조를 만들 수 있다는 의미다.
이날 토론에서는 북한의 대외 전략과 미·북 관계를 둘러싼 현실론도 제기됐다. 정 박은 “비핵화보다 현실적인 목표는 갈등 완화(conflict mitigation)”라며, 군사적 오판 가능성을 낮추기 위한 군-군 대화와 위험 감소 메커니즘 구축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는 과거처럼 ‘핵 포기’를 전제로 한 포괄적 합의가 아니라, 단기적 안정 관리 중심 접근으로의 전환을 의미한다.
최근 ‘김정은은 예상보다 훨씬 능숙한 전략가’라고 평가했던 정 박은 최근 북한의 외교적 입지에 대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의 밀착이 중국에 대한 협상력과 러시아에 대한 영향력을 동시에 높이고 있다고 분석했다. 토론에 함께 참석한 조너선 청 월스트리트저널 베이징 지국장은 보다 직설적인 평가를 내놨다. 그는 북한이 사실상 핵보유국이며 이것이 외부 위협으로부터 체제를 보호해왔다고 평가했다. 그는 이 현실을 인정하는 것을 출발점으로 삼아 어떤 거래가 가능한지를 모색할 수 있다는 견해를 밝혔다.
워싱턴/김원철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