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한 경찰 마약수사대는 지난해 마약 드로퍼(전달책)를 정보원으로 확보했다. 곧장 마약 조직 판매자 등 조직 ‘윗선’을 접촉해 붙잡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다. 필리핀에 있는 마약 판매자가 정보원에게 ‘비행기표를 끊어주겠다’며 필리핀 입국을 지시한 것. 경찰은 드로퍼의 친구로 가장해 동행하는 방법을 검토했지만 결국 포기했다. ‘친구’의 신원을 요구할 게 분명한 마약 조직에 제시할 위조 여권을 만들 수 없었던 탓이다. 당시 ‘마약류관리에 관한 법률’(마약류관리법)은 마약 수사를 위한 경찰의 위조 신분증 발급을 허용하지 않았다. 이 사건을 수사했던 경찰관은 27일 한겨레에 “정보원과 동행했다면 윗선을 특정해 검거했을 것”이라며 “이제라도 위장 수사가 법제화돼 좀 더 다각적인 기획 수사를 할 수 있어 다행”이라고 말했다.
마약범죄 수사관의 위장 수사를 허용하는 마약류관리법 개정안이 지난 23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경찰들 사이에선 수사관의 신분 비공개와 위장 수사 허용을 핵심으로 한 개정안 통과로, 국경을 넘나들며 얽혀 있는 마약 조직의 하부를 고리로 조직을 총괄하는 ‘윗선’에 접근할 길이 열렸다는 평가가 나온다. 다만 범죄의 지능화에 대응하는 수단으로 도입된 ‘합법적 위장 수사’가 자칫 위법 수집 증거, 범의가 없는 사람에 대한 범죄 유도 등 부작용을 낳을 수 있다는 우려도 동시에 존재한다.
이번 법 개정으로 수사기관은 위장 신분을 통해 마약류 소지·매매·광고·수수·운반·수입을 할 수 있다. 신분을 숨기기 위한 문서와 전자기록(위조 신분증, 등초본 등)을 작성·변경하는 것도 가능하다. 다만 수사권 남용 등을 견제하기 위해 법원의 허가를 받아야 하고, 수사 기간을 3개월로 한정했다. 필요하면 3개월 단위로 연장해 최대 3년까지 위장 수사가 가능하다. 지금껏 국내에서 이런 위장 수사가 허용된 분야는 아동 성착취물 수사뿐이었다.
경찰에선 수사망을 피해 비대면·점조직 형태로 진화해온 마약 조직의 뿌리를 색출할 수 있다는 기대가 크다. 최근 마약범죄는 주로 텔레그램 등 보안 메신저를 통해 지시와 판매가 이뤄지고, 전달 또한 인적이 드문 곳에 마약을 숨겨두는 이른바 ‘던지기’ 방식으로 유통된다. 이 때문에 범죄 현장을 적발해도 조직 하부를 붙잡는 데 그치는 한계가 지속됐다.
이런 상황에서 경찰은 그나마 ‘범죄 의사가 있는 사람에게 범행 개시를 유도하는 건 함정수사가 아니다’라는 취지의 2007년 대법원 판례에 의존해 그간 부분적으로 위장 수사를 벌여왔다. 하지만 ‘범죄 의사’라는 모호한 기준 탓에 수사 위법성이 문제가 되는 경우가 적잖았다. 실제 마약범죄자들이 법정에서 ‘함정수사에 걸려든 것’이라며 무죄를 주장하는 일이 빈번했다고 한다. 1990년대 초부터 마약 수사에 위장 수사를 도입한 독일, 후생노동장관 허가에 따라 함정수사의 길을 튼 일본에 견줘 마약 수사 기법이 범죄를 따라가지 못한다는 우려가 나온 이유다.
마약 담당 수사관들은 고무된 분위기다. 최근까지 8년 동안 마약범죄를 수사해 온 전진흠 경위(대전 유성경찰서)는 “이제 마약을 들여오고 판매하는 ‘몸통’에 접근이 가능해지고, 텔레그램 방에서 ‘인증된’ 구매자가 되면 마약 투여 오프라인 모임 같은 곳도 급습할 수 있다”고 말했다. 지역의 또 다른 마약 수사관도 “투약자, 드로퍼, 수거책, 중간관리책, 총책 검거로 이어지는 수사의 연속성이 마련됐다”고 전했다.
박고은 기자 euni@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