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 월드컵 응원 열기 비하면 분위기 차분
축구열정 냉각보다 공동체적 열광 줄어든듯
학생들이 열정과 냉정사이 균형점 찾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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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공만 있으면 즐거웠다. 공간이 부족하면 족구를 했고, 축구공이 없으면 우유팩 차기라도 했다. 축구인생 반백년이니 추억이 없을쏘냐.
1994년 7월 북한 김일성 주석이 죽던 날, 갈비뼈 두 대가 부러지며 폐를 찔렀다. 허파에 바람이 들었다는 기흉(氣胸)이었다. 2009년 5월 노무현 대통령이 서거한 날, 이회택, 김재한 선수 등 69학번 축구선수 출신들로 구성된 '69회'팀과 경기를 하다 왼쪽 발목이 삐었다.
불굴의 의지로 영원할 줄 알았던 축구인생은 노화(老化)가 진행되면서 끝났다. 혼자서 드리블하거나 터닝을 하다가 제풀에 관절과 근육에 문제가 생겨 깁스나 목발 신세를 지는 날이 많아졌다. 필자는 여전히 자랑스러운 시인축구단 '글발' 창단멤버다. 축구인생이 육체적 부상의 역사였다면, 응원의 역사는 마음의 상처가 덧나는 역사였다. 월드컵은 기쁨보다 슬픔을 안겨주었다. 우리는 '큰 공'(축구, 농구, 배구 등) 대신 '작은 공'(골프, 배드민턴, 탁구 등)에 올인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셀프 인종차별에 괴로워했다.
단 한번의 예외가 있었으니, 2002년 월드컵이다. 당시 모 신문사 사건기자였는데, 월드컵취재팀에 차출됐다. 터키와의 4강전이 열린 6월 29일 밤. 휴대폰이 계속 진동했다. 우리 장병들의 사망과 함정의 침몰 등 제2 연평해전 속보가 이어졌다. '이 경기 끝나자마자 연평도 출장 지시가 떨어질 것 같은데?'라는 예감 속에 기사를 마감했다. 경기장은 붉은악마의 열광과 한반도의 냉전, 월드(world)컵과 워(war)컵이 뒤섞인 장소였다.
한국팀 경기 7차례 동안 연인원 2200만명(전 국민의 47%)이 거리 응원에 나섰다고 한다. 1919년 3·1운동 3개월간 202만여명과 비교해도 압도적 수치다. 2002년 월드컵은 대한민국 광장 민주주의의 킥 오프 휘슬이었고, 그 주역들이 지금의 4050 촛불세대다.
2026년 북중미 월드컵 분위기가 싸늘하다. 축구에 대한 열정이 식어서가 아니라 공동체적 열광이 감소했기 때문인 듯하다. 지금의 2030은 국가와 민족 같은 거대한 집단 서사보다 공정, 기회, 개인의 삶에 민감한 첫세대가 아닐까. 이것이 지난 24년 동안 한국 사회의 가장 큰 문화적 변화인지도 모른다. 지금의 2030을 담아낼 그릇은 더 이상 정당이 아닐 수도 있겠다.
환갑을 앞둔 축구팬의 입장에서 인생을 돌이켜보자면, 광장에서든 밀실에서든 한 경기라도 더 보는 게 '개이득'이다. "라떼는 말이야"라고 운을 떼는 추억 하나가 인생을 조금 더 견딜 수 있는 힘을 주기 때문이다. 필자가 고교생 시절이던 1983년, 멕시코 세계청소년축구대회(FIFA U-20 월드컵) 때의 일이다. 한국팀이 8강에 오르자 학교에서 라디오를 틀어주었다. 몇몇이 복도를 지나, 계단을 내려가, 건물 밖으로 뛰쳐나갔다. 으슥한 담벼락에 몸을 밀착했다. 선생님들은 교무실에서 TV를 보고 계셨던 것일까? 모처에서 한국팀의 4강 진출을 TV로 보고나서 다시 학교 담을 넘었다. 착지 후 몸을 일으키는 순간, 체육선생님(이하 '체육')이 나타났다. 천적을 만난 짐승은 '얼음'이 된다. 근육은 물론 비명소리조차 굳어버린다. 체육이 턱으로 가리키는 곳으로 갔다. 탈옥수들이 엎드려 뻗쳐를 하고 있었다. 체육은 우리의 동태와 동선을 살피고 있었던 것일까! 그날 몽둥이찜은 다른 날에 비해 덜 아팠다. 그날 체육의 관대함은 지금껏 인생의 미스터리다.
내일 남아공전 때 각급 학교 교실에서 TV를 틀어주었으면 한다. 우리 후손들이 응원의 열정과 냉정을 오가면서 각자 나름의 균형을 찾아가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20년 후 어느 부모는 자녀에게 자신의 응원으로 한국팀이 32강에 안착했다고 뻐길지도 모른다. "라떼는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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