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사 사정 나빠지면 제일 먼저 내보내는 게 방송작가거든요. 평소 제작 잘 될 때는 ‘한 가족’이라면서 초과 근무를 당연시하다가 인력 구조조정 할 때는 작가들부터 계약 해지하는 거죠. 자회사 프로듀서들도 그렇게 잘려 나간 적이 있고요.” 20년간 방송작가로 일한 김현정 작가(‘연중마감 오늘도 씁니다’ 저자)가 말했다.
23일 중앙그룹 홍정도 부회장과 종합편성채널 제이티비시(JTBC) 전진배 대표 등이 기업회생 절차를 위해 법원에 출석한 가운데 이른바 ‘비정규직 백화점’인 방송사의 임금 체불 위험이 가시화하고 있다. 이날 한겨레 취재를 종합하면, 제이티비시는 이달 중순에 지급하기로 했던 방송작가 원고료를 정산 날짜를 넘겨서도 지급하지 못했다. 익명의 제이티비시 작가들은 “기다려 보겠다”면서도, “원고료가 밀렸는데도 내부 사정을 제대로 설명해 주지 않는다”는 억울함과 고용 불안을 호소했다. 이와 관련해 제이티비시는 “(원고료 상황을) 구체적으로 확인해 주기 어렵다”고 밝혔다.
제이티비시를 비롯한 방송사들은 작가와 연출, 분장, 음향 등 다양한 제작 인원을 고용 계약이 아닌 위탁(프리랜서) 계약 형태로 쓴다. 실질적 해고가 쉽고 인건비도 낮출 수 있어서다. 이들은 사실상 노동자인데도 임금 체불 시 국가 보호를 받지 못한다. 원래 근로기준법 적용 대상이라면 국가가 체불 피해 노동자를 대신해 사업주를 추심하고 임금을 가장 먼저 갚아야 할 항목(최우선변제채권)으로 분류해 노동자에게 지급한다. 국가가 직전 3개월 임금과 3개년치 퇴직금을 먼저 지급하는 ‘체당금’ 제도도 있다. 그러나 프리랜서 계약을 강요당한 수많은 방송 노동자들은 체불 임금 관련 권리를 모두 박탈당한다. 그저 용역 대금을 못 받은 방송사의 수많은 채권자 중 하나로 분류될 뿐이다.
지난 19일 방송미디어통신위원회(방미통위)가 고시한 ‘2025년 방송사업자 재산상황 공표’를 보면 제이티비시는 지난해 방송 프로그램 제작·구입 비용에 모두 2425억원을 지출했다. 올해도 유사한 규모로 투자했다면 향후 비정규직 인건비 미지급 문제는 눈덩이처럼 불어날 수 있다. 그러나 제이티비시 회사채 등 투자자 피해에 이찬진 금융감독원장이 명시적 점검 의지를 표명한 것과 달리, 고용노동부는 임금 체불 위험에 별다른 대처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다. 제이티비시 담당인 고용노동부 서울서부지청은 “사안을 모니터링하고 있다. 심각해지면 감독을 나가겠다”고만 밝혔다.
방송사 비정규직 사건을 대리하는 하은성 노무사는 “이미 정규직 고용 부담을 줄이려고 프리랜서와 파견 고용을 반복하거나 공정을 쪼개어 외주 제작사에 위탁하는 관행이 방송계에 만연하다”며 “고액 출연료 중심의 제작 환경은 그대로 둔 채 비정규직에게만 책임을 전가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최근 외주 프로그램 제작진들도 임금을 못 받은 사례가 나왔다. 지난달 종영한 제이티비시 아이돌 성장 프로그램 ‘ 날아라 병아리’ 제작진 ㄴ씨는 한겨레에 “방송작가와 카메라 감독 십수명이 아직 급여 정산를 못 받았다”고 밝혔다. 제이티비시로부터 지난달 말 대금을 받은 하청 제작사가 ‘자금 융통이 어렵다’며 노동자들에게 정산을 미루고 있다는 것이다. ㄴ씨는 “이런 하청·재하청 고용 구조를 짠 건 방송사인데 왜 매번 피해는 노동자가 떠안아야 하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제이티비시는 상당수 예능·리얼리티 프로그램을 외주 제작사에 맡긴다. 방송사는 기획·편성만 맡고 프로그램 제작은 외주로 넘기는 형태다. 프로그램 성과는 방송사에 귀속되지만 정작 그 프로그램을 만든 노동자 임금 체불 등의 문제는 방송사가 책임지지 않는 구조다.
ㄴ씨는 “과거 다른 방송사에서도 비슷한 문제가 있었는데 원청 방송사가 하청 제작사를 불러다 문책했더니 바로 입금됐다”며 “그런 해결 방식도 기가 차지만 제이티비시는 디폴트 사태로 그조차도 기대할 수 없다”고 토로했다. 건설업은 이런 사고를 막기 위해 노무비 계좌를 따로 만들거나 공사 대금을 받는 즉시 노동자 몫을 바로 지급한다. 그러나 방송계는 이런 최소한의 보호 장치조차 없다시피 하다.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도 지난 20일 성명을 통해 이런 권리 사각지대 보호를 촉구했다. 센터는 “제이티비시와 프리랜서 계약으로 일하는 작가, 피디, 조연출 등이 용역 대금이 아닌 임금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개인이 감당하기 어려운 법적 절차를 밟아야 한다 ”며 “외주 제작 프로그램에서 일하는 스태프들도 임금 채권으로 보호받기 어려운 것은 마찬가지”라고 짚었다. 제이티비시가 앞서 표명한 대로 방송 콘텐츠 정상 운영을 목표로 한다면, 지금이라도 이들의 고용 차별을 해소해야 한다는 것이다.
김유경 노무법인 돌꽃 대표 노무사는 제이티비시 사태를 계기로 정부가 ‘방송사 비정규직 백화점’ 문제에 더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고 본다. 그는 “기존에도 방송사가 노동부 지적을 받으면 노동자를 정규직이 아닌 계약직으로 전환해 일정 기간이 지나면 해고하는 등의 편법을 썼다. 노동부가 그걸 알면서도 방치한 게 지금의 현실을 만든 원인”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지금 제이티비시에서 벌어지는 일을 본다면 단순 모니터링을 넘어 노동부의 더 실질적이고 실효성 있는 조치가 필요하다. 제대로 방송 비정규직 편법 고용의 실체를 드러내거나 위법적 행태를 실질적으로 시정하는 데 힘을 실어야 한다”고 당부했다.
신다은 기자 down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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