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일 서울 중구 스페이스에이드 제니스홀에서 열린 ‘기억을 지키다’·‘기억을 태우다’ 출간 기자간담회에서 찬와이 작가는 “영화판에서 시나리오를 쓰며 홍콩의 황금기를 함께 호흡했지만, 결국 문학이야말로 거대한 역사 속에서 소외된 개인의 삶을 복원하는 온전한 그릇”이라며 이같이 밝혔다. 찬 작가는 영화 ‘첨밀밀’과 ‘프로젝트 A’ 등 전설적인 고전의 각본 기획에 참여하며 대중문화를 깊숙이 이해해 온 대표적인 거장이다. 이번에 국내에 동시 선보인 두 연작은 1997년 반환을 전후로 정체성의 혼란과 실존적 불안을 겪어 낸 홍콩인들의 파란만장한 역사와 지워지지 않는 마음의 궤적을 덤덤하고 온기 어린 필치로 그려 냈다.
찬 작가는 홍콩인들이 마음에 품은 집단적 트라우마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그는 “2014년 우산혁명이 시작되고 나서 많은 사람이 일상으로 돌아갔지만, 사람들의 감정과 마음속까지 예전과 같을 수는 없다”라며 “누군가는 깊은 상처를 남겼다고 생각한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아 보여도 홍콩인들 대부분은 일종의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PTSD)를 겪고 있다”고 진단했다.
홍콩 국가보안법 통과 이후 타향을 맴돌아야 했던 지식인으로서의 쓸쓸한 소회도 이어졌다. 찬 작가는 “낮에는 대학에서 강의하고 밤에는 홍콩의 친구들이나 홍콩 관련 소식을 찾아보며 주말마다 홍콩으로 향하는 생활을 반복했는데 무척 힘든 여정이었다”라며 “마지막으로 홍콩에 간 것은 2020년 1월이었으나, 코로나19로 오가기 어려워진 데다 이후 국가보안법이 배포되면서 이제는 돌아가기가 매우 힘들어졌다”고 토로했다.

최근 전 세계적인 화두로 떠오른 AI 기술의 범람 속에서 문학이 지켜내야 할 인간 고유의 가치에 대한 묵직한 통찰도 제시됐다. 찬 작가는 원문의 ‘추억(追憶)’이라는 단어가 지닌 미학적 의미를 환기하며 “원문에서는 사실 기억이 아니라 ‘추억’이라는 단어가 쓰였다. 내가 경험한 것을 기반으로 그 안에 담긴 인간적인 감정을 함께 느끼는 행위이며 잘 생각해 보면 그 안에는 항상 다른 사람이 존재한다”고 강조했다. 데이터의 축적과 인간의 사유를 혼동하는 세태를 향한 경고이기도 했다. 그는 “AI는 철저하게 유용한 데이터만을 기억할 뿐 우리가 가진 인간의 축복과 같은 감정을 투영하지는 못한다”라며 “대학에서 강의하다 보면 학생들이 글쓰기에 AI를 많이 참고하곤 하지만, AI의 연산 방식이 우리 인간의 추억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인간의 추억은 감정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영역이기 때문”이라고 피력했다.
타이완으로 주거지를 옮긴 이후에도 홍콩이라는 공간과 인물들의 삶을 집요하게 추적해 온 찬 작가는 차기작을 향한 계획도 구체적으로 밝혔다. 그는 “대만에서 연재를 마치고 출간하게 된 차기작은 코로나19 팬데믹 상황 속에서 벌어진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며 “홍콩을 떠나 대만으로 이주해 살아가고 있지만, 제가 평생 겪어온 홍콩에서의 경험과 대만 현지인들의 경험은 엄연히 다르다”고 선을 그었다. 이어 “이 과거의 기억과 경험은 억지로 지울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제 손에 담긴 내용은 여전히 홍콩의 정서가 깊이 담겨 있다”며 공간이 변하더라도 전통과 유대는 끊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증명해 보였다.
간담회 끝에 찬 작가는 “과거의 이야기이지만 현재와 미래를 잇는 이야기라는 생각이 든다”며 독자들을 향해 시대적 상실을 넘어설 화두를 던졌다. 그는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일은 일종의 다리를 놓는 작업과 같으며, 텍스트를 통해 과거의 조각들을 끊임없이 되짚어가는 것”이라며 “비록 현실의 파괴음 속에서 과거로 온전히 돌아갈 수는 없을지라도, 온라인이나 책을 통해 그 흔적을 찾아내고 연결하는 작업은 큰 의미가 있다”라며 이야기를 끝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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