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 '베민'에 판 깔아준 정부
머니투데이
'배달의 민족'을 빗대 '베팅의 민족' 자조
삼전·닉스 레버리지 ETF 회전율 급등
레버리지 ETF 투자한도 등 규제 의견도
우리는 스스로를 '배달의 민족'이라 불러왔다. 빠르고 부지런하다는 자부심이 담긴 말이다. 그런데 요즘 증시를 보면 그 별명에 새로운 뜻이 겹쳐진다. '베팅의 민족', 줄여서 '베민'이다.
코스피가 9000선을 돌파하며 사상 최고치를 잇달아 경신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52주 최저가 대비 500%, SK하이닉스는1000%이상 올랐다. 상승장이 이어지자 개인투자자들의 베팅 강도도 함께 세졌다. 공포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듯 개인투자자들이 레버리지 상품으로 몰려들고 있다. 지난달 27일 국내 첫 단일종목 레버리지 ETF(상장지수펀드)가 상장한 지 12거래일 만에 시가총액이 4조5000억원에서 9조6000억원으로 두 배 넘게 불어났다. 같은 기간 개인이 사들인 삼성전자·SK하이닉스 레버리지 ETF 물량만 8조2000억원어치로 전체 순매수액의 92.7%다. 반면 유동성공급자(LP) 등 기관은 레버리지 ETF를 8조6000억원어치 순매도했다. 팔자는 기관이고 사자는 개인이다.
이 풍경이 낯설지 않다. '동학개미운동'으로 불린 2020년 이후 개인투자자의 베팅 강도는 단계적으로 세져왔다. 우량주 장기 보유에서 테마주 단타로, 다시 코인으로, 이제는 레버리지 파생상품까지 왔다. 주가가 오를수록 더 큰 수익을 향해 달려가는 FOMO(소외에 대한 불안감)가 시장 전체를 물들이고 있다. 배달 앱 '배민'이 빠름을 팔듯 '베민'도 속도를 판다. 다른 점은 손실도 같은 속도로 온다는 것이다.
속도도 놀랍다. 하루 평균 매매 회전율이 122.5%에 달해 현물 주식(1%)은 물론 기존 레버리지 ETF(30.2%)와도 비교가 안 된다. '단일종목 레버리지가 전국 회사 화장실을 트레이딩 룸으로 만들었다'는 우스갯소리가 현실이 됐다. 투자가 아니라 베팅이고, 베팅이 아니라 중독에 가깝다. 점심시간 편의점 앞에서, 지하철 환승 통로에서, 회의 직전 화장실 칸 안에서 호가창을 들여다보는 풍경이 낯설지 않다. 레버리지 ETF가 투기 광풍의 기폭제가 됐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워 보인다.
문제는 이 투기판을 사실상 정부가 열어줬다는 점이다. 부동산 대출과 신용융자는 옥죄면서 사실상 차입 투자와 같은 효과를 내는 단일종목 레버리지에는 아무런 제한도 없다. 서학개미를 국내로 되돌리겠다는 명분이었지만 정책 효과는 미미하고 부작용만 커지고 있다.
판을 깔아준 정부가 해야 할 일도 분명하다. 시장에선 단일종목 레버리지 ETF에 대한 투자 한도와 레버리지 배율 규제를 도입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온다. 부동산 담보대출엔 LTV(주택담보대출비율)를 적용하면서 사실상 2배 차입 효과를 내는 레버리지 상품에 아무런 총량 규제가 없다는 건 형평성에 어긋난다고 보는 것이다. 또 형식적인 심화 교육 이수 제도도 손봐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현재는 온라인 강의 수강만으로도 투자 자격이 주어지는데 실질적인 위험 인지 여부를 확인하는 방식으로 강화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시장을 열어준 책임은 시장을 지키는 책임으로 이어져야 한다.
더 근본적인 물음이 있다. 주가 급등이 우리 투자 문화의 성숙을 뜻하는가, 아니면 또 한 번의 광풍인가. 배달의 민족은 빠른 실행력이 강점이다. 그러나 주식시장에서 빠름은 때로 가장 큰 적이다. 인덱스펀드의 아버지인 존 보글 뱅가드 창업자가 평생 강조한 말이 있다. "자제력을 잃지 마세요. 과도한 위험을 감수하지 마세요." 수십 년 전 경고가 지금 한국 증시에 그대로 꽂힌다.
'베팅의 민족'이라는 자조 섞인 별명이 현실이 되지 않으려면 지금이라도 멈춰 서야 한다. 베팅과 투자는 비슷해 보이지만 본질이 다르다. 베팅은 결과를 예측해 한쪽에 돈을 거는 행위다. 투자는 불확실성을 관리하면서 시간과 함께 가치를 키우는 행위다. 베팅에는 흥분이 있지만 투자에는 원칙이 있다. 그 원칙 위에 서야만 시장에서 오래 살아남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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