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즈음이었던 것 같다. 여러 개인적 이유로 올해는 일만 하며 보낼 게 뻔했다. 그런 내가 안쓰러워서 선물을 주고 싶었다. 에이아이(AI)와 대화를 나누다가 당장 신청할 수 있는 마라톤 대회를 찾아달라고 했다. 답변 중에서 ‘호놀룰루’라는 글자가 보였다. 호놀룰루? 와이키키해변 있는 곳? 하와이? 호놀룰루 마라톤 대회 신청 페이지를 누르고, 영어로 길게 쓰여 있는 내용을 에이아이와 해석해가면서 기어코 신청을 해버렸다. 보통 해외 마라톤은 추첨을 통해 참가자가 정해지게 되는데, 이 대회는 추첨이 아니라 신청만 하면 참가할 수 있는 방식이었다. 신청을 누르자마자 결제 창이 뜨더니 내 카드 사용 목록에 영어로 한줄이 추가되었다. 이 모든 게 토요일 오전, 강아지를 산책시키고 돌아와 식탁 의자에 앉아 거실을 멍하니 보다가 일어난 일이었다.
호놀룰루 마라톤 대회는 매년 12월 둘째 주 일요일에 열린다. 올해는 오는 12월13일이 대회 날이다. 이 대회를 나가기로 결정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올해만은 겨울에 혹사당하지 않겠다는 의지. 1년 내내 일만 할 텐데, 그 결실의 시기가 겨울이라니. 따뜻한 도시에 가자. 12월의 하와이는 한낮이면 27도 안팎까지 오른다. 나는 여름을 좋아한다고 매해 겨울에 생각하곤 했다. 물론 매해 여름엔 겨울을 더 좋아했던 것 같지만. 기적처럼, 대회를 신청하고 나서 모든 일이 잘 풀렸고, 가끔 우울할 때도 대회를 떠올리곤 했다. 12월의 추운 어느 날 뜨거운 하와이의 태양 아래서 달리고 있는 내 모습을 그렸다.
어, 그런데 6월이 되고 기온이 높아지니 문득 ‘어? 어? 27도인데 풀코스 마라톤을 뛰어?’라고 내가 나에게 질문한 것이다. 엉뚱하게도 그걸 이제야 물은 것이다. 한여름 날씨에 풀코스 마라톤을 어떻게 뛰어? 황당해서 웃음이 나왔다. 따뜻한 곳에 여행을 가고 달리기도 하니까 설레기만 했던 것이다. 현실적인 것들은 안중에도 없었다. 지금까지 풀코스 마라톤은 세어보지는 않았지만 20번 가까이 뛴 것 같다. 순간적으로 20~22도 정도 기온이 올라간 적은 있지만 대체로는 그보다 낮은 기온에서 뛰었다. 그러니 이 대회는 새로운 도전을 하는 게 되는데, 이런저런 상념에 잠겨 있다가 든 결론은, ‘그런데 나 한여름에 달리는 거 좋아하지 않아?’였다. 그렇다. 나는 좋아했던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유명한 풀코스 마라톤 대회는 당연히 봄과 가을에 열린다. 가을에 열리는 대회에 나가려면 여름 내내 연습해야 한다. 기온이 30도가 넘을 때도 20~30㎞ 달리기를 꾸준히 하면서 몸에 거리를 익혀야 한다. 나는 그걸 좋아했다. 물론 힘은 들지만. 장거리 훈련을 마치고 제로 콜라를 단숨에 들이켜면 목에 청량감이 마구 몰려들어서 목젖 주위가 쓰라리고 아파진다. 그 순간 튀어 올라 몸이 터져서 소멸할 것 같은 쾌감이 든다. 뒷목과 후두부 전체를 마비시켜 존재하는 모든 감각 중에 오직 고통만이 올바른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하는 찰나의 어리둥절! 그러나 이 절정의 감각들은 여름에 달리며 시시각각 느끼는 고통과 희락의 반복에 비하면 작고도 미약하다. 만약 삶이 무기력하고 스스로가 보잘것없어서 우울하다면, 기꺼이 기어코 여름 달리기를 하면 된다. 나는 그렇게 했고, 행복을 찾았다.
여름 달리기를 할 때 유의할 점을 몇가지 적어보자면 다음과 같다. 아스팔트보단 흙길이 낫다. 한여름 아스팔트 지열은 무시무시하다. 기온이 30도인 날, 직사광선을 받은 아스팔트 위를 달리면 60도 가까이 달궈진 표면 위를 뛰는 것과 다름없을 때도 있다. 흙길은 조금 덜하고, 나무 그늘이 있는 흙길은 훨씬 덜하다. 여름 나무는 잎이 무성해서 그늘도 크고 넓다. 그런 곳의 공기는 당연히 아스팔트 위보다 쾌적하다. 그러니 공원을 달리거나 산 주변의 둘레길을 달리자.
모자 쓰기. 모자는 작은 그늘이다. 특히 얼굴을 보호한다. 얼굴이 덜 뜨거우면 상대적으로 더 뜨거울 때보다 체력 소모가 적다. 우리 몸의 순환 장치는 뜨거워진 얼굴을 식히려고 애를 쓰기 때문이다. 얼굴이 덜 뜨겁다는 건 몸이 적게 일한다는 것이다. 땀이 눈에 들어가는 것도 방지할 수 있다. 가끔 자외선 차단제가 땀에 녹아 눈에 들어갈 때가 있는데 따가울 뿐만 아니라 순간적으로 앞이 잘 안 보여 신경 쓸 것도 많아진다. 신경 쓸 것을 줄여야 조금이라도 편하게 달린다. 그리고 모자에 차가운 물을 뿌리면 뜨거워진 머리를 식힐 수 있다. 모자가 냉각팬 구실을 하기 때문이다. 아, 그리고 엄청 중요한 거! 강한 자외선이 두피와 모낭에 좋지 않은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연구가 있다. 머리카락은 절대 지켜야 하기 때문에 모자를 반드시 써야 한다.
자외선 차단제 바르기. 당연한 건데, 잘 안 바르게 된다. 종종 러닝을 오래 한 러너들을 보면 운동을 꾸준히 해왔을 텐데도 오히려 얼굴이 또래보다 늙어 보인다. 나는 자외선 차단제를 안 바르고 달렸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덧발라야 한다. 한시간 넘게 달리기를 한다면 땀도 많이 흘릴 텐데, 한번 바르는 거로 부족하다. 장거리 훈련을 하는 날은 2시간 이상 달린다. 그런 날은 중간에 잠시 쉬면서 전해질 음료를 마신다. 그런데 이때 자외선 차단제를 덧바르는 경우는 별로 없다. 발라야 한다. 특히 한여름엔 말이다.
그리고 또 한가지 중요한 것. 열심히 달리지 않는 것. 다른 계절에 달릴 때보다 느린 속도로 짧게 달리자. 굳이 빠르게 멀리 달릴 필요가 없다. 힘이 들면 걸어도 된다. 빨리 멀리 달리는 건 봄과 가을에도 힘들다. 여름엔 덜 빠르게 덜 멀리 달려도 훨씬 힘이 든다. 힘들면 달리기를 계속할 수가 없다. 계속하려면, 역설적이지만, 열심히 달리지 않아야 한다. 그렇게 달리기를 하다 보면 어떤 날은 바람이 불고 어떤 날은 뜬금없이 시원하다. 더위도 쉬는 날이 정말로 있다. 그런 날은 열심히 달려도 좋다. 그리고 자주 비가 온다. 비 맞으며 달리는 게 송곳 같은 햇빛이 찌르는 날 달리는 것보다 훨씬 쾌적하다. 그런 날도 여느 날보다 조금 더 열심히 달릴 수 있다. 달리는 걸 좋아하고 여름에도 기어코 달리겠다는 의지가 있다면, 달리기의 신은 우리가 달릴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준다. 이건 미신이 아니다.
그래서 한겨울에 열리는 나의 뜨거운 마라톤 대회에서 목표는 한국에서 풀코스를 뛰었을 때보다 1시간 늦게 피니시라인에 들어오는 것이다. 목이 마르지 않아도 급수대가 나타나면 반드시 한모금씩 물을 마실 것이다. 이 대회는 도전이 아니다. 무엇을 이루기 위해 뛰는 것이 아니다. 좋아하는 달리기를 그저 계속하는 것일 뿐. 행복하게, 더 행복하게.
이우성 콘텐츠 제작사 미남컴퍼니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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