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30일 아르헨티나 코르도바주 외곽의 한 들판에서 14살 소녀 아고스티나 베가가 실종된 뒤 일주일 만에 숨진 채 발견됐다. 부검 결과 베가는 성폭행을 당한 뒤 목이 졸려 살해된 것으로 확인됐다. 검찰은 33살 남성 클라우디오 바렐리에르를 여성혐오 범죄(페미사이드) 혐의로 체포했다. 바렐리에르는 베가 어머니의 전 남자친구로 베가의 가족과 오랜 친분이 있었다.
수사 당국에 따르면 베가는 실종 당일인 지난달 23일 밤 10시30분께 집을 나와 택시를 타고 바렐리에르의 집으로 향했다. 폐회로텔레비전(CCTV)에는 그가 집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찍혔지만, 살아서 나오는 장면은 확인되지 않았다. 당시 베가는 가족들에게 할아버지가 운영하는 음식점에 다녀오겠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베가가 무슨 이유로 어머니의 전 남자친구를 찾아갔는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유족과 여성단체들은 베가가 실종된 직후 경찰에 수색을 요청했지만 대응이 늦었고, 피의자에게 과거 여성폭력 신고 전력이 있었음에도 적절한 조치가 이뤄지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14살 소녀 베가 살해 사건이 아르헨티나 사회를 뒤흔들고 있다. 최근 한 달새 베가 외에도 17살 소녀와 30살 여성이 잇따라 살해되면서 여성폭력 문제가 다시 사회적 쟁점으로 떠올랐다. 지난달 17살 소녀가 버려진 건물의 정화조에서 숨진 채 발견됐고, 30살 여성은 경찰에 도움을 요청했음에도 연인에게 살해됐다. 마침 여성폭력 반대 운동 ‘니 우나 메노스’(단 한 명의 여성도 더는 잃을 수 없다) 출범 11주년 시위가 지난 3일 열리면서 전국적인 여성폭력 반대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
‘니 우나 메노스’ 운동은 2015년 14살 소녀 키아라 파에스가 남자친구에게 살해된 사건을 계기로 시작됐다. 1년이 지난 지금 이 운동은 여성에 대한 폭력과 페미사이드 근절을 요구하는 아르헨티나의 대표적 사회운동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번 사건은 운동의 출발점이 된 키아라 파에스 사건 당시의 충격을 다시 떠올리게 하며,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여성폭력 문제를 사회 전면에 재소환하는 계기가 됐다.
현지 매체인 라나시온과 스페인어권 매체 엘파이스 등 보도를 보면, 브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열린 집회에 참가한 18살 자스민 비온도는 “성평등에 대한 논의가 이전 세대보다 활발한 환경에서 성장했지만, 여전히 과거 여성들이 겪었던 문제들로부터 자유롭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혼자 길을 걷거나 밤에 외출할 때 불안을 느낀다며 “여성이라는 사실은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부터 잠자리에 들 때까지 삶의 모든 순간에 영향을 미친다”고 말했다. 함께 시위에 참석한 미란다 야푸르(18)도 권력층의 발언이 젊은 세대의 상황을 개선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인플루언서들이 여성에 대한 혐오와 차별적 의견을 거리낌없이 드러낼 수 있는 분위기가 만들어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번 시위에서 밀레이 정부의 여성 정책 축소도 주요 쟁점으로 떠올랐다. 시민단체들은 여성 폭력 예방 및 피해자 지원과 관련한 예산이 밀레이 대통령 취임(2023년) 이후 89% 감소했고, 관련 국가기관과 지원 프로그램도 대폭 축소됐다고 밝혔다. 이런 정책 축소는 국가의 젠더 정책 개입을 줄이고 법 앞의 형식적 평등을 강조해 온 밀레이 정부의 기조를 반영한 것으로 해석된다. 앞서 지난해 1월 밀레이 대통령은 다보스포럼 연설에서 “소위 문명국이라 불리는 많은 나라에서 여성을 살해했을 때 더 무거운 처벌을 받는 것이 당연시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는 여성의 생명이 남성보다 더 가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하는 등 현행 제도를 비판한 바 있다. 직후 법무부는 “어떤 생명도 다른 생명보다 더 가치 있지 않다”며 형법상 페미사이드 조항 폐지 방침을 밝혔다.
법학자들과 여성단체들은 페미사이드가 단순히 여성 피해자를 대상으로 한 살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배우자나 전 배우자, 연인 등 친밀한 관계에서 반복된 폭력 속에서 발생하는 성별 기반 범죄를 가리킨다고 설명한다. 아르헨티나 형법은 이런 범죄를 일반 살인보다 중대한 범죄로 규정해 무기징역형을 선고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페미사이드는 피해자가 신뢰하던 파트너에게 안전한 공간에서 기습적으로 당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방어가 어렵다는 점에서 가중처벌 대상이 된다.
아르헨티나 대법원은 지난해 전국에서 200여건의 페미사이드 사망 사건이 발생했다고 밝혔다. 이는 약 44시간마다 한명의 여성이 페미사이드로 목숨을 잃는 수준이다. 대법원 통계에 따르면 피해자의 83%는 가해자를 알고 있었고, 59%는 배우자 또는 전 배우자에게 살해됐다. 자택에서 범행을 당한 피해자는 78%로 집계됐다.
윤연정 기자 yj2gaz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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