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면 속 쇳물 표면이 새까만 불순물로 뒤덮여 있었다. 굴착기 팔을 닮은 약 1.4톤의 거대한 장비 ‘스키머’가 쇳물 위를 훑기 시작하자, 3분 만에 쇳물 표면이 밝게 빛났다. 모니터에 표시된 배재율(쇳물에서 불순물을 걷어낸 정도)은 24%에서 순식간에 72%를 넘어섰다. 이 모든 과정에서 현장 작업자는 스키머를 조작하는 조이스틱에 단 한 번도 손을 대지 않았다. 최근 방문한 경북 포스코 포항제철소 3제강공장 예비처리(KR) 운전실의 풍경이다.
■ 제철소 쇳물 불순물 걷어내는 인공지능(AI) 철강 산업은 극한의 열에너지와 화학 반응을 미세하게 통제해야 하는 기술 집약적 산업으로 꼽힌다. 섭씨 1300도가 넘는 고열의 쇳물에서 황과 같은 불순물을 제거하는 예비처리 공정은 철강 제조 공정의 첫 단계다. 1년 전만 해도 노동자는 손으로 조이스틱을 직접 조작해 스키머를 제어하고 불순물을 걷어내야 했다. 노동자들이 하루 평균 8천번이 넘는 미세 조작을 수행하며 극심한 근골격계 피로를 겪은 이유다. 또한 불순물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는 안쪽 불순물 제거를 위해 400톤 규모의 래들(쇳물이 담긴 통)을 기울여야 했는데, 수동 조작 체제에서는 스키머와 래들을 동시 조작할 수 없었다. 자칫 고온의 쇳물이 현장에 쏟아져 대형사고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공지능에 기반을 둔 자율조업 시스템이 현장 데이터를 읽고 설비를 미세하게 제어하는 지금은 스키머의 이동과 래들의 기울임을 동시에 제어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자율조업 시스템을 개발한 권오형 포항제강부 2제강공장 대리는 “쇳물에 불순물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이 시스템은 남은 불순물의 위치와 양상을 보고 스키머를 움직여 한쪽으로 몰아낸 뒤 한 번에 걷어낸다”며 “30~40년 경력의 숙련자들이 이 모습을 보더니 ‘나 하는 만큼 한다’고 했다”고 말했다. 속도는 아직 고숙련 작업자보다 느리지만, 인간 작업자의 노하우를 계속 학습하고 있는 만큼 효율은 점차 높아질 것으로 포스코 쪽은 보고 있다. 현재 이 시스템 도입이 완료된 3제강공장에서는 모든 직원이 이를 잘 활용할 수 있도록 작업 표준을 제정해 학습 중이다. 회사는 자율조업 시스템을 2제강공장 등 다른 공장으로도 확대 적용할 방침이다.
■ 설비 점검도 원격으로 사람의 감각과 숙련에 의존하던 전통 제조업 현장 곳곳에 ‘피지컬 인공지능’이 스며들고 있다. 피지컬 인공지능은 인공지능이 데이터를 수집·분석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실제 설비와 로봇을 움직여 물리적 작업을 수행하는 기술을 뜻한다. 정해진 순서를 반복하는 자동화를 넘어 현장 상황을 읽고 판단해 장비를 제어하는 것이 핵심이다. 시장조사업체 마켓츠앤마켓츠는 글로벌 피지컬 인공지능 시장이 2026년 15억달러에서 2032년 152억4천만달러로 커지고, 이 가운데 산업용 로봇 부문은 연평균 56.7% 성장할 것으로 내다봤다.
인공지능 적용 범위는 생산 공정을 넘어 설비 유지·보수 영역으로도 넓어지고 있다. 지난 1월 포항제철소 원료 하역기 4호기에는 무선 센서와 인공지능 카메라로 설비의 온도·진동 변화와 아날로그 게이지값을 판독하는 사물인터넷(IoT) 기반 인공지능 예지정비 장치 ‘아이오티-아이(IoT-EYE)’가 설치됐다. 작업자가 40~50m 높이 설비에 올라 확인하던 유압실 게이지값을 현장 사무실에서 확인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지태호 포스코 전기·계장·제어(EIC) 기술부 리더는 “작업자가 높은 곳이나 가동 중인 설비에 접근하지 않아도 돼 사고 위험을 줄이고, 이상 징후도 더 빠르게 포착할 수 있다”고 했다.
고온가스와 폭발 위험 때문에 사람이 접근하기 어려운 풍구상(고로에 열풍을 불어넣는 설비 주변)에는 현대자동차그룹의 로봇 자회사인 보스턴다이내믹스의 사족보행 로봇 ‘스팟’이 지난 2월부터 투입돼 온도 계측 등의 작업을 수행하고 있다. 공장 내부의 복잡한 배관 사이를 자유자재로 누비는 스팟은 임무를 마치면 스스로 충전소로 돌아가 전력을 보강하며 다음 임무를 준비한다.
■ 조선업, 비정형 용접기술 100% 자동화 이런 변화는 한화오션 거제 옥포조선소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최근 찾은 조선소 내 1공장의 티바(선박의 뼈대가 되는 부품) 조립 구역에서는 천장에 매달린 20대의 크레인형 용접 로봇이 일제히 푸른 불꽃을 튀기며 작업을 하고 있었다. 놀라운 점은 이 20대 로봇을 통제하는 인력이 단 2명뿐이라는 사실이다.
오퍼레이터가 단말기(PDA)를 통해 도면 정보를 전송하면, 로봇의 접촉식 센서가 7분간 용접 부위의 좌표를 인식한 뒤 약 15분간 자율적으로 본용접을 실행한다. 로봇 20대가 두 시간 만에 완료하는 작업량은 숙련된 용접공 30명이 4시간 동안 쉬지 않고 매달려야 하는 분량과 맞먹는다.
한화오션은 현재 조선소 내에서 총 110여 대의 용접 로봇(크레인형 80대, 이동형 30대)을 10여 명의 오퍼레이터가 운용하고 있다. 특히 이동형 로봇은 무선 통신 기능을 탑재하고도 15kg 수준에 불과해 좁은 작업 공간에서도 활용도가 높다.
24년 조선소 경력 중 20년을 용접공으로 일하다 3년 전 오퍼레이터로 직무를 전환한 박진우(가명)씨는 “과거에는 무거운 장비를 짊어지고 비좁은 블록 사이를 오가며 유독성 흄(용접 연기) 가스를 직접 마셔야 했지만, 지금은 세팅만으로 작업이 끝난다. 안구 충혈이나 근육통도 사라졌다”고 말했다. 그는 로봇이 한 용접의 완성도를 두고서도 “10년 이상 된 최상급 숙련공만이 구현할 수 있는 오차 없는 직선과 균일한 결과물을 보여준다”고 극찬했다.
■ 피지컬 AI 도입 속도전 배경에는? 철강과 조선업이 피지컬 인공지능 도입에 속도를 내는 배경에는 인력난과 안전 문제가 있다. 조선업은 높은 노동강도와 열악한 작업환경 탓에 신규 인력 유입이 쉽지 않고, 철강업도 고온·고소(높은 곳) 작업과 가동 중인 대형 설비 점검 등 위험 작업이 많아 현장 인력 확보가 쉽지 않다. 한국고용정보원과 한국산업기술진흥원의 ‘2026년 상반기 주요 업종의 일자리 전망’을 보면 조선업과 철강업의 미충원율은 각각 14.4%, 16.3%로, 전 산업 평균인 8.4%를 웃돌았다.
한화오션은 2030년까지 제한된 수작업을 제외하고 용접 자동화율을 100%에 가깝게 끌어올릴 계획이다. 고영호 한화오션 생산자동화팀장은 “동일한 규격의 제품을 양산하는 반도체나 자동차 산업과 달리, 조선업은 작업장마다 부재(각각의 구조물) 사이의 불규칙한 틈이 발생하는 전형적인 비정형 산업”이라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 실시간으로 틈을 인식하고 용접 조건을 조정하는 ‘비전 인공지능 기술’을 연내 도입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피지컬 에이아이의 도입에 따른 제조업 일자리 감소는 거스를 수 없는 구조적 흐름이다. 하지만 현장에서는 다른 목소리도 나왔다. 박씨는 “서른명이 할 일을 로봇이 빠르게 해내면 후행 공정 라인이 더 빨리 돌아가서 전체 협력사 일감이 오히려 늘어난다”며 “로봇이 일자리를 뺏는다는 이야기는 20년 전에도 나왔지만 나는 여전히 일하고 있다”고 말했다. 다른 제조 현장에서도 비슷한 목소리가 나왔다. 한 배터리 기업 관계자는 “앞으로 현장 인력에게는 ‘쏟아지는 공정·불량 데이터를 비판적으로 읽고 해석해 최종 판단을 내리는 데이터 해석 역량’이 중요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현장에서 접한 피지컬 인공지능은 노동 환경을 개선하는 혁신인 동시에, 노동 시장의 진입 장벽을 높여 양극화와 구조적 실업이라는 과제를 던지고 있었다.
포항·거제/이재호 기자 ph@hani.co.kr, 유하영 기자 yh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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