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용범 대통령실 정책실장이 한국 금융의 불편한 민낯을 직시했다. 금리와 신용등급이라는 기존 질서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며, 금융 시스템이 작동하는 방식 자체를 문제 삼은 것이다.
그의 문제의식은 단순하다. 왜 가장 힘겨운 사람이 가장 무거운 금리의 짐을 지는가. 금융 논리로 보면 자연스러운 결과다. 상환 능력이 높은 차주에게 낮은 금리를 적용하는 것은 시장의 기본 원칙이다. 하지만 그는 이 원칙 뒤에 숨은 전제를 건드린다. 그 전제를 설계한 사람이 바로 자신이라는 고백과 함께다. 기획재정부 1차관과 금융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낸 김 실장의 "나는 공범"이라는 한 마디는, 이 시스템을 가장 가까이서 설계하고 운용해온 사람의 자성이라는 점에서 무게를 갖는다.
"거꾸로 돼야 하는 것 아닌가"…금융의 상식을 흔든 질문이같은 문제의식은 이재명 대통령이 여러 차례 제기해온 질문과 맞닿아 있다. 이 대통령은 그간 수차례 "가장 여유 있는 사람이 낮은 금리를 누리고, 가장 절박한 사람이 가장 비싼 이자를 내야 하는가. 거꾸로 되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취지의 문제를 반복적으로 제기해왔다.
김 실장 역시 처음에는 이를 "신용의 기본을 모르는 질문"으로 받아들였다고 털어놨다. 그는 "돈을 갚을 능력이 증명된 사람에게 낮은 금리를 주는 것, 그것이 금융의 ABC이자 흔들리지 않는 질서라고 믿었다"고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인식은 바뀌었다. 그는 이 질문이 "우리가 당연시해 온 그 전제의 심장을 찌르는 질문"이었다고 평가했다. 이어 "금융은 도대체 누구를 지키고 있는가. 우리는 무엇을 잣대로 사람의 가치를 매기고 있는가"라고 되물었다.
김 실장은 이 지점에서 신용평가 체계의 한계를 짚는다. 현재 신용등급은 미래 상환능력을 예측하는 도구처럼 포장돼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정교하게 요약된 과거의 잔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연봉이 같아도 정규직과 자영업자의 신용은 다르게 평가된다. 금융 거래 이력이 없으면 성실한 삶도 잠재적 낙오자로 분류된다. 실직, 질병, 이혼 같은 삶의 변수는 모델 안에 존재하지 않는다.
'도넛 시장'…중간이 사라진 금융이 같은 문제의식은 금융 구조 전반에 대한 진단으로 이어진다. 김 실장은 한국 금융을 양극단만 존재하는 '도넛형 시장'으로 규정한다. 고신용자는 낮은 금리로 자금을 조달하고, 저신용자는 고금리 시장으로 밀려난다. 정작 가장 많은 사람이 머물러야 할 중간 신용층은 시장에서 외면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김 실장은 이를 시장의 실패가 아니라 금융기관의 선택으로 봤다. 고신용자는 비용이 적게 들고, 저신용자는 높은 금리로 수익을 확보할 수 있는 반면, 중간 신용층은 개별 평가 비용이 크고 수익성이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김 실장은 "이건 금융이 무능해서가 아니라, 철저히 계산된 ‘회피 전략’ 때문"이라며 "리스크는 관리해야겠고 비용은 쓰기 싫으니, 그 구간을 다루지 않는 선택이 더 합리적으로 작동해 온 셈"이라고 설명했다.
결국 금융기관이 해당 구간을 회피하는 구조가 고착화됐고, 이는 금융 양극화를 단순한 결과가 아니라 구조적 산물로 만든다는 분석이다.
책임 구조에 대한 문제 제기도 이어진다. 과거 금융위기는 대형 자본과 복잡한 금융상품에서 발생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위기 이후 강화되는 기준과 규제는 개인에게 먼저 적용됐다는 것이다. 그는 "폭풍이 지나가고 나면 리스크 관리라는 명목하에 가장 먼저 문전박대당하는 건 늘 중저신용자"라며 "문제는 구조의 실패를 개인의 책임으로 치환하는 방향 전환"이라고 비판했다. 실제 프로젝트파이낸싱(PF)과 파생상품, 금융회사 리스크 등으로 시스템이 흔들릴 때마다 중저신용자가 시장에서 배제되는 흐름이 반복돼왔다.
구조 개편 필요성 제기…공은 금융당국으로김 실장은 해법 역시 구조에서 찾아야 한다고 봤다. 중간 신용층을 포괄할 수 있도록 대출 구조를 조정하고, 과거 이력 중심의 신용평가 체계를 확장하며, 서민금융 역할을 재정립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특히 "문제는 공급의 양이 아니라, 공급이 멈춰버린 그 '위치'에 있다"고 짚었다. 중간 신용층이 배제된 구조 자체를 바꾸지 않는 한 금융 양극화는 해소되기 어렵다는 인식이다. 또 "끊어진 시장을 잇고, 방치된 시장을 메우는 것"이 핵심이라고 강조했다. 금융이 외면해온 구간을 다시 연결하는 것이 해법이라는 의미다.
그러면서 "해법은 금융당국과, 면허를 부여받은 시중은행·인터넷은행·서민금융기관이 내놓아야 한다"고 못 박았다. 아울러 "신용질서는 배제에서만 만들어지지 않는다. 더 정교한 구분과 이해에서도 만들어진다"는 말도 덧붙였다.
이재명 정부 들어 금융 포용은 선언의 수준을 넘어 구조 개편의 문제로 격상됐다. 김 실장의 이번 문제 제기는 제도 금융이 자원을 배분해온 기준과 신용평가 체계 전반을 재점검해야 한다는 요구로 해석된다.
이는 건전성 중심으로 설계돼 온 금융 시스템의 작동 원리를 어디까지 조정할 것인지에 대한 정책 판단의 문제로 이어질 수 있다. 구체적인 정책 그림을 어떻게 그릴지, 공은 이제 금융당국으로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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