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마음만 먹으면 당일치기 동해 여행을 할 수 있다. 2018년 평창 겨울올림픽 개최를 계기로 개통한 서울∼강릉 구간 고속열차(KTX) 덕분이다. 예전에는 차로 5시간 넘게 걸리던 길을 이제 2시간이면 갈 수 있다. 몇해 전 원주에 정착한 뒤 좋은 점은 동서남북 어디든지 수월하게 다녀올 수 있다는 점이다. 강릉을 비롯해 평창, 동해, 삼척, 정선, 태백, 영월 등 과거에는 오지처럼 멀게만 느꼈던 지역을 언제든 여행할 수 있다.
그중 평창은 입춘이 한참 지난 3월에도 눈이 쌓이는 곳이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춥고 겨울이 가장 긴 지역이다. 그 중심에 대관령이 있다. 동해에서 서쪽을 향해 부는 습한 바람이 고지대인 대관령에서 가로막히면서 형성되는 기후다. 평창군이 내세우는 브랜드 ‘해피(HAPPY) 700’은 평창의 해발 높이인 700m를 뜻한다. 사람과 동식물이 살기 가장 좋은 고도가 700m란 의미를 담고 있다. 덕분에 스키나 스노보드, 설산 하이킹, 백패킹 등 겨울 아웃도어를 즐기는 이들에게 평창은 겨울의 끝자락까지 누릴 수 있는 지상낙원이다.
평창 여행에서 빠질 수 없는 곳이 해발 1157m의 선자령이다. 영동 지역과 영서 지역을 가르는 대관령이 구름도 쉬어 가는 고개라면, 대관령 북쪽에 솟은 선자령은 바람이 일어나는 고개다. 둔덕 위에 세워져 사시사철 돌아가는 풍력발전기 아래 서면 어느새 김광석의 노래 ‘바람이 불어오는 곳’을 흥얼거리게 된다. “힘겨운 날들도 있지만/ 새로운 꿈들을 위해/ 바람이 불어오는 곳/ 그곳으로 가네/ 바람에 내 몸 맡기고/ 그곳으로 가네” 가사가 묘사하는 풍경 속을 걷다 보면 어느덧 선자령 정상에 서 있다.
‘대관령 숲길’은 대관령과 선자령의 숨결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등산 코스다. 1922년부터 6년간 소나무 씨앗을 산에 직접 뿌리는 직파조림 방식으로 조성된 숲이다. 숲은 1988년 문화재 복원용 목재 생산림으로 거듭났고, 2000년에 열린 ‘제1회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22세기를 위해 보존할 아름다운 숲’이란 영예를 안았다. 2017년엔 경북 울진 금강소나무숲, 충북 단양 죽령 옛길과 함께 ‘경영·경관형 10대 명품 숲’에 선정됐고, 2021년 5월1일 산림청 국가숲길로 지정됐다.
지난 3월 중순, 집 앞 개천에 봄꽃이 잎눈을 뜨기 시작할 때 대관령에 사는 친구가 연락해 왔다. “엊그제 눈이 내렸으니 올해 마지막 눈을 보러 오라”고 말이다. 봄은 예정대로 올 것이다. 하지만 겨울 풍경은 이때를 놓치면 1년을 기다려야 한다. 겨울 연례행사처럼 오르던 설악산 산행도 하지 못한 터였다. 겨울을 제대로 보내지 못한 느낌이었다. 하얀 설원이 그리웠다. 먹고사는 일로 바빠지기 전에 순백의 길 위를 하염없이 걷고 싶었다.
겨울 선자령을 찾은 것은 3년 만이다. 선자령은 봄에도, 여름에도, 가을에도 한번씩 올랐다. 봄에는 복수초, 노루귀, 괭이눈과 같은 야생화를 볼 수 있어 좋고, 여름에는 텅 빈 능선 위에서 뜨거운 태양과 시원한 바람을 같이 만날 수 있어서 좋다. 가을에는 특유의 고즈넉한 정서가 있다. 선자령과 대관령옛길을 중심으로 이어지는 ‘대관령 숲길’의 총거리는 자그마치 103㎞다.
아침 10시, ‘대관령 숲길’ 안내센터(강원도 평창군 대관령면 경강로 5760)로 출발했다. 이미 길 위에 눈이 가득했다. 장롱 깊숙이 넣어둔 겨울 산행 장비를 꺼냈다. 방한이 잘되는 상의와 하의, 방풍·보온 재킷, 귀를 덮는 모자, 장갑, 아이젠 등이다. 500㎖ 물 2병과 간단한 행동식도 배낭에 넣은 뒤 길을 나섰다. 참고로 코스 내 별도의 휴게 시설이 없기에 준비물을 꼼꼼히 챙겨야 한다. 미처 준비 못 한 물품이 있다면 ‘대관령 숲길’ 안내센터 부근 대관령마을휴게소에서 사면 된다.
국립기상과학원 구름물리선도관측소에서 선자령 이정표를 따라갔다. 등산로와 아스팔트 임도를 연이어 오르자 케이티(KT) 대관령중계소가 보이고, 이윽고 사거리에 도착했다. 왼쪽은 강원도 기념물로 지정된 ‘대관령 국사성황사’ 가는 길, 오른쪽은 반정을 경유해 1988년 국내 최초로 조성된 자연휴양림인 대관령자연휴양림 가는 길이다. 목적지인 선자령을 향해 직행했다. 아이젠을 꺼내 신발에 착용했다. 눈앞에 이어지는 눈길을 차곡차곡 밟으며 나아가는 기분이 좋았다.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로 선자령의 청량한 바람이 불었다.
이 길은 내게 무척 익숙한 길이다. 2016년부터 매해 5월 이 지역에서 개최되는 트레일러닝 대회에 출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관령 숲길’ 안내센터가 있는 광장에서 선자령, 바람의 언덕, 보현사 등을 거쳐 경포호수광장으로 골인한다. 이러한 경험 때문에 선자령 가는 길은 설명할 수 없는 긴장감을 준다. 숨이 턱에 차오르도록, 뒤도 옆도 돌아보지 않고 오로지 앞만 보며 10년 가까이 이 길을 달렸다. 그렇게 달린 길을 지금 세상 가장 느린 속도로 걷고 있다. 다시 달리기 위해 에너지를 채우는 시간이다.
간밤에 캠핑한 것으로 보이는 젊은 남녀 등산객 무리가 큰 배낭을 짊어지고 반대편에서 걸어왔다. ‘빛나는 청춘’이란 말이 떠올랐다. 선자령은 알려져 있다시피 겨울 백패킹 성지다. 하지만 실상 선자령의 초지는 ‘대관령 하늘목장’의 소유로 취사나 캠핑이 공식적으로 금지돼 있다. 최근 백패킹과 장거리 트레킹을 즐기는 이들을 위해 야영과 체류가 가능한 동서트레일이 마련됐다. 자연을 누리는 방식이 확장되는 만큼 그에 걸맞은 질서 역시 조금씩 자리 잡아가고 있다.
사시사철 언제 올라도 실망한 적이 없었던 선자령의 능선에서 지난 시절 남몰래 끌어안고 있었던 걱정과 불안, 미움과 원망 같은 사념을 스스럼없이 풀어놓았다. 숱한 세월 같은 자리를 지키는 풍력발전기가 마치 거대한 바다 위 등대처럼 든든했다. 머잖아 녹아 사라질 하얀 눈밭을 오래 눈에 담았다. 멀리서 올라오는 등산객이 점처럼 작게 보였다. 같은 방향 길을 걷는 사람들을 보면 위안이 됐다. 그 길이 옳다고, 나도 이렇게 나의 길을 가고 있으니까, 당신도 계속해서 당신의 길을 가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선자령 정상에서 재궁골 방면으로 내려가면 출발지인 ‘대관령 숲길’ 안내센터로 돌아갈 수 있다. 시간도 넉넉히 남았고, 모처럼 대관령옛길을 걷고 싶은 마음에 방향을 돌려 초막교 방면으로 내려갔다. 이 길은 약 3㎞에 이르는 급격한 내리막이라 발밑의 돌을 조심하며 걸어야 한다. 이정표를 따라 대관령자연휴양림에 들어섰다. 숲속 집 서너채가 다정하게 나를 반겼다. 이곳은 강릉시 성산면 어흘리다. 졸지에 평창에서 강릉으로 넘어온 것이다.
대관령자연휴양림에서 삼포암폭포를 감상한 뒤 다시 대관령옛길로 넘어갔다. 그 길 위에서 수만그루의 소나무와 만났다. 무려 100여년 역사를 자랑하는 금강소나무다. 높이 20m 이상의 커다란 나무가 하늘을 향해 장쾌하게 뻗은 모습은 인상적이었다. 바람에 온갖 시름을 씻어낸다고 해서 ‘풍욕대’라 불리는 이곳은 2007년 4월28일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방문한 명소다. 풍욕대에 잠시 누워 소나무 가지 사이로 들어오는 햇볕을 쬐니 신선이 따로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반정은 과거 평창과 강릉을 넘나드는 길목 위 주막터가 있던 자리였다. 전망대 너머로 강릉 시내가 윤곽을 드러낸다. 뿌옇게 연무가 끼어 강릉의 모습이 신기루처럼 아득했다. 오래전 선조들은 걸어 다녔을 고갯길 위로 영동고속도로가 지나고 있다. 어느덧 해가 저물었다. 더 어두워지기 전에 대관령으로 가기 위해 발걸음을 서둘렀다. 더 나아가고 싶은 마음을 뒤로하고 여정을 마무리했다. 남아 있는 길은 여전히 길고 앞으로 더 좋은 나날이 다가올 것이다.
장보영 ‘아무튼, 산’ 저자